■-건축 이야기/♣-우리의 거리읽기

영남(嶺南)은 문경새재를 기준으로...세월따라 고개따라...

이종국 2009. 7. 4. 19:47

 

 

새재 서낭신의 복수...

새재는 소백 산맥을 가로질러 충청도와 경상도를 이어 주는 고개입니다.
이 고개는 조선 시대 초기에 영남 대로가 생기면서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답니다.
영남 대로는 서울 양재역(말죽거리)에서 시작되어.....

경기도 이천, 연풍, 경상도 문경, 상주, 선산, 대구, 밀양을 거쳐 부산까지 이어지는 도로입니다.

이 도로를 따라 사람과 물자가 이동하였는데...,

경상도의 선비들이 과거 시험을 보기 위해 이 길을 이용했다고 합니다.


문경 새재는 ‘산이 높아 날으는 새가 쉬어 넘어간다’고 해서

그 이름을 얻었을 만큼 험한 고개입니다.

 

이 고개에는 조선 인조 임금 때 영의정을 지낸 최명길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옛 이야기가 전해 내려옵니다.

 

최명길이 스무 살쯤 되었을 때 하루는 경상도 안동 땅을 찾아가게 되었습니다.

안동에는 최명길의 외삼촌이 안동 부사로 가 있었습니다.
최명길은 영남 대로를 따라 걸어 내려와 문경 새재를 넘게 되었습니다.
새재는 과연 소문 대로였습니다.

얼마나 가파르고 험한지 꼬불꼬불한 고갯길을 쉬엄쉬엄 올라가야 했습니다.

최명길은 땀을 비오듯 흘리며 걷다가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소복을 입은 젊은 여인이 따라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남자도 무서워 혼자 넘기 힘든 고개를 여자 혼자 넘다니…….

담력이 보통 아닌데.’ 최명길은 놀란 눈으로 여인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런데 여인은 담력만 좋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걸음이 얼마나 빠른지 금세 최명길을 앞질러 버렸습니다.

최명길은 너무 놀라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습니다.
‘기가 찬 노릇이군. 순식간에 나를 따라잡다니.’

최명길은 여인의 뒷모습을 넋놓고 바라보다가 이렇게 중얼거렸습니다.
“무슨 여자가 표범보다 더 빨라? 사람이야, 귀신이야?”
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여인이 걸음을 멈추고 몸을 홱 돌렸습니다.

여인은 미소 띤 얼굴로 최명길을 찬찬히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습니다.
“나는 사람이 아니라 새재 서낭신입니다.

볼일이 있어 안동에 가는 길이지요.”
여인의 말을 듣고서야 최명길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역시 그랬군. 사람이라면 그렇게 빨리 걸을 수 없지.’
최명길은 서낭신에게 물었습니다.
“나도 안동에 가는 길입니다만, 안동에는 무슨 볼일로 가십니까?”
서낭신이 대답했습니다.
“좌수(조선 때, 군현의 수령을 보좌하던 자문 기관인 향청의 우두머리를 이르던 말) 딸을 죽이러 갑니다.”
“예? 아니, 좌수 딸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기에……?”
“내가 아끼는 치마 저고리를 가졌거든요.

그 치마 저고리는 중국 비단으로 만든 귀한 옷이에요.

며칠 전에 새재를 자주 오가는 비단 장수가 서낭당에 바쳤지요.

 

그런데 어제 서낭당에 있는 내 치마 저고리를 안동에 사는 좌수가 훔쳐가, 자기 딸에게 주어 버린 거예요.

그래서 좌수 딸을 죽여 앙갚음을 하고 치마 저고리도 찾을 겸 안동까지 가는 겁니다.”
최명길은 서낭신의 말을 듣고 어이없다는 듯 서낭신을 쳐다보았습니다.
“허허, 사람 목숨은 다 하늘에 매여 있는데 그 까짓 일로 사람을 함부로 죽입니까?

화가 나더라도 참으셔야지요.”
최명길은 좌수 딸을 죽여선 안 된다고 거듭거듭 부탁했습니다.

서낭신이 말했습니다.
“당신이 간절히 부탁하니 할 수 없군요.

죽이진 않고 혼내는 것으로 그치겠습니다. ……

당신 얼굴을 보니 훗날 큰 일을 하실 분이군요.

영의정이 되어 크게 이름을 떨칠 뿐 아니라,

병자호란이 일어나면 큰 공을 세우시겠어요.

이제 머지않아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일어나 중국 땅을 호령하게 될 것입니다.

당신은 명나라를 멀리하고 청나라와 친하게 지내십시오.”
말을 마친 서낭신은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습니다.

최명길은 안동에 도착하자마자 외삼촌에게 인사를 드리고, 좌수 집을 수소문해 찾아갔습니다.
좌수 집은 초상집이 되어 있었습니다.
“아이고, 아침까지도 멀쩡하던 애가 갑자기 죽다니, 이 무슨 변고란 말이냐?”
좌수 딸이 죽었다고 온 가족이 목놓아 울고 있었습니다.

최명길은 좌수를 만나 말했습니다.
“따님을 살리러 왔습니다.

그러니 안심하십시오.”
“제발 부탁드립니다.

딸아이를 살려 주십시오.

그러면 이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좌수는 신신 부탁을 하고는 최명길을 딸의 방으로 안내했습니다.
방문이 닫혀 있었습니다.

 

최명길은 방문을 열고 방 안을 들여다보았습니다.

방 안에는 좌수의 딸이 누워 있고,

그 옆에 서낭신이 앉아 좌수 딸의 목을 누르고 있었습니다.
서낭신은 최명길을 보자 좌수 딸의 목에서 손을 떼고, 조용히 일어나 공손히 인사했습니다.
“이제 오십니까?

저는 그만 돌아가겠습니다.”
서낭신은 좌수 딸의 방에서 나오더니 바람처럼 사라졌습니다.
최명길이 좌수에게 말했습니다.
“새재 서낭당에서 가져온 치마 저고리가 있지요?”
“아니, 그걸 어떻게……?”
“그것을 가져오십시오.”

좌수는 최명길이 시키는 대로 치마 저고리를 가져왔습니다.
최명길은 마당으로 나와 치마 저고리를 불태웠습니다.

그리고 좌수에게 부탁하여 음식을 차려 서낭신을 위해 제사를 지내게 했습니다.
제사를 마치자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죽었던 딸이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 좌수에게 최명길이 말했습니다.
“이번 일은 좌수께서 치마 저고리를 가져와 서낭신의 노여움을 사서 생긴 일입니다.

서낭신을 위해 서낭당을 크게 지어 준다면 앞으로 집안에 병을 앓는 사람이 없을 겁니다.”
좌수는 최명길이 일러 준 대로 새재에 서낭당을 크게 지었습니다.

그 뒤부터는 좌수 집에 감기 한 번 앓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서낭신의 예언대로 최명길은 훗날 영의정이 되었으며,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큰 공을 세웠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