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슬로-바이킹 박물관(Viking skips museet)
오슬로 대학교 문화역사 박물관의 일부이다,
피오르드에서 발견된 오세베르그호(Oseberg ship),고크스타호(Gokstad ship),투네호(Tune ship) 등 3척의 바이킹선을 보존전시되어있다.
선체의 장식과 부장품들이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고 관광객을 위한 사진 촬영을 위한 촬영장소도 지정되어있다.
800∼900년경에 바다를 누비며 활약했던 바이킹선이다.
오세베르그호(Oseberg ship), 고크스타호(Gokstad ship), 투네호(Tune ship) 소개(배들의 이름은 발견된 장소의 이름에서 명명)
오세베르그호 : 가장 크고 우아한 배로 800년대부터 50년 동안 사용된 여왕의 배이다.
여왕이 죽은 후 묘지로서 시체와 함께 매장됨. 각종 장식품 및 부엌용품과 가구류가 발견됬다.
고크스타호 : 길이 23m,최대 폭5m로 32명이 노를 젓고 돛을 달아 항해하는 전형적 바이킹선,짐승머리로 장식된 침대, 3척의 보트등 발견
투네호 : 배 밑바닥을 제외한 다른 부분은 부패된 상태로 발견, 원거리 항해용으로 이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개관 시간
5월 1일 - 9월 30일 :
매일 : 오전 9시 - 오후 6시
10월 1일 - 4월 30일 :
매일 : 오전 10시 - 오후 4시
(※ 휴무 : 12/24-26, 12/31-1/1,
성 금요일, 부활절 전야․주일)
입장료
- 성인 : NOK 50
- 학생, 노인, 단체(최소 10명) : NOK 35
- 아동 (7세-16세) : NOK 30
- 가족(성인 2명+16세 이하 아동 2명) :
NOK 125
7세 이하 아동, 오슬로 패스 소지자 : 무료
위치
Huk Aveny 35, 0287 OSLO
Nationaltheatret에서 Bygdoy로 가는 30번 버스
여름에는 시청 앞 부두에서 Dronningen 가는
페리 탑승 가능
연락처
Tel. +47 2213 5280
http://www.khm.uio.no/vikingskipshuset/
바이킹... 북유럽 하면 떠오르는 유일한 이미지라 더 애착이 간다. 바이킹 박물관은 어떤 것들로 채워져 있을까... 조심스럽게 들어가 본다.
Fram museet(프람 박물관)
탐험가 난센이 제작하여 북극 탐험에 이용한 플람이라는 배가 있다.
탐험가 아문센이 남극 탐험을 하는데 이용한 배 이기도 하다.
북극과 남극을 탐험한 이용한 배이다.
난센이 배의 이름을 플람이라고 지었다.
가는방법 : 30번 버스와 91번 페리 이용하여 갈 수 있다.
입장료 : 오슬로 패스가 있으면 무료 입장이다.
콘티키 박물관
인류학자 헤위에르달이 탐험할때 이용했던 배가 전시되어 있다.
헤위에르달이 페루에서 남태평양에 있는 섬까지 가는데 이용한 콘티키(Kon-Tiki) 배를 직접 볼 수 있다.
가는방법 : 30번 버스와 91번 페리 이용하여 갈 수 있음
입장료 : 오슬로 패스가 있으면 무료 입장
◈ 바이킹의 의미
스웨덴의 작가 얀 기유(Jan Guillou)에 의하면 바이킹이라는 말을 긍정적 의미로 주로 사용하게 된 것이다.
에리크 구스타프 예이예르(Erik Gustaf Geijer)가〈바이킹(The Viking)〉이라는 시를 쓰면서부터였다.
오늘날 바이킹을 용감하고 호전적인 해양 전사로 생각하는 것은 당시의 정치적 이유와 관련이 깊다.
즉 1809년 스웨덴이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600년간 스웨덴 영토였던 핀란드를 잃자 이를 회복할 자신감을 북돋기 위해 용감하고 영화로운 과거 역사를 창조할 필요가 있던 것이다.
예이예르가 회원으로 있던 예타회(Geatish Society)라는 단체는 용맹스런 바이킹 역사 창조에 큰 역할을 했다.
역시 예타회 회원이었던 작가 에사이아스 텡네르(Esaias Tegnér)는 사가문학 작품〈프리티오프 사가(Frithiofs Saga)〉를 근대적으로 개작해 북유럽과 영국, 독일에서 큰 인기를 얻어 바이킹에 대한 인식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지리학적으로 그리 풍요롭지 않고 9-11세기만 해도 가장 야만스러웠던 북유럽 국가들이 오늘날 최선진국이 될수 있었던 이유는 이들의 선조 바이킹들로부터 찾을 수 있다.
바이킹들의 적극적인 해외 진출모색, 그리고 그로 인해 신문화의 수용은 능동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들의 정신적인 지주인 오딘을 따라 용감히 싸우면서 약탈과 교역을 통해 이들이 획득한 신문화는 여러 나라로 퍼져갔다.
따라서 중세시대의 문화적 허브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뛰어난 항해술로 새로운 항로를 개척함으로써 이들이 정렴했던 국가는 현재 또한 훌륭한 교역로를 가지고 있는 선진국들이다.
중세시대에 가장 무서운 존재였던 바이킹은 현재 북유럽국가 기상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
◈ 바이킹들의 나라
현재 바이킹의 후예라고 할 수 있는 나라들은 노르웨이, 스웨덴, 덴마크 그리고 아이슬란드라고 할 수 있다.
이들 나라의 공통점은 국가 성장과 복지를 한꺼번에 이루어 낸 현재 지구에서 가장 살기 좋은 나라로 평가받고 있는 선진국들이란 점이다.
이렇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역사적으로 봤을 때 바이킹들은 생존을 위한 활발한 해외 진출을 꼽게 된다.
해외 진출을 통해 습득한 항해술과 바이킹 배의 건조 기술은 현재 건조 분야에서 세계적인 선진 국가인 노르웨이를 탄생시켰다.
해외 진출 과정속에서 여러 문물과 신교도를 받아들이게 되고 급기야 여러나라를 지배하고 세우기까지 한다.
따라서 오늘날에는 바이킹이 단순한 해적으로만 받아들이지 않고 정복, 탐험과 교역을 통해 중세 유럽 전 영역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것으로 평가된다.
바이킹은 크게 덴마크계와 노르웨이계, 스웨덴계로 나눠진다. 앞의 2계통은 주로 서유럽으로, 스웨덴계는 동유럽으로 진출을 했다.
원정 초기에는 농한기인 여름에 출발하여 바다가 거칠어지는 겨울이 되기 전에 돌아왔으며, 족장에게 인솔된 전사가 중심이었다.
하지만 9세기 중엽부터 행동의 범위가 넓어져, 하구(河口),후미 등에서 숙영을 하면서 겨울을 지내고 거기서부터 내륙으로 침입하는 정복적 성격을 띠었다.
토지를 점령하고 정착하는 단계가 되자 가족을 데리고 왔다.
그때 농민,상인,직인(職人) 등도 가담하여 식민적 성격이 강해졌으며, 원주민과의 융합,동화,그리스도교에의 개종 등이 진척되었다.
그사이 현지의 왕 등에게 용병(傭兵)으로서 일하면서 스스로 소공국(小公國)을 건설하였다.
나아가 각지에 건설한 기지를 연결하는 무역을 하는 등 활동이 다양하였다.
◈ 노르웨이 바이킹 역사
800-1066년은 노르웨이 역사에서 바이킹 시대로 간주된다.
이 시기동안 노르웨인들은 스웨덴인이나 덴마크인과 함께 긴 바이킹 배로 약탈, 탐험, 정착, 무역을 통해 해외로 진출했다.
노르웨이 바이킹은 주로 영국과 아일랜드 등의 서쪽으로 진출했다.
리고 바이킹 약탈은 유럽의 많은 지역에 영향을 미쳤다.
노르웨이의 바이킹은 스코틀랜드 북방의 셰틀랜드제도, 오크니제도에 이주하였다.
860년경에는 북대서양 페로제도를 거점으로 아이슬란드를 식민화하였다.
9세기 말에는 여기서부터 그린란드로 건너가서 식민지를 건설하였다.
그들의 사가에 1000년경 족장 레이프는 더욱 남하하여 헤르란드, 마르크란드, 빈란드 등을 발견하였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위의 지명은 대략 오늘날의 래브라도,뉴펀들랜드 또는 노바스코샤,뉴잉글랜드의 북부에 해당된다고 추정된다,
바이킹은 콜럼버스 이전에 미국을 발견한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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