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 화성
화성(華城)은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와 장안구에 걸쳐 있는 길이 5.4킬로미터의 성곽이다.
1963년 사적 3호로 지정되었으며,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수원 화성은 한국 성의 구성 요소인 옹성, 성문, 암문, 산대, 체성, 치성, 적대, 포대, 봉수대 등을 모두 갖추었다.
한국 성곽 건축 기술을 집대성했다고 평가된다.
축성
조선 후기 정조때인 1794년 착공하여 1796년 9월 10일에 준공되었다.
기존에 화강암으로 쌓았던 방식을 버리고 벽돌로 쌓는 축성 공사에는 정약용이 고안한 거중기가 사용되었다.
정조 가 그의 아버지의 묘를 수원에 옮기면서 축조한 성으로 거중기, 녹로 등 신기재를 사용해 만들어졌다.
화성은 군사적 방어기능과 상업적 기능을 함께 보유하고 있으며 실용적인 구조로 되어 있어 동양 성곽의 백미로 평가 받는다.
동북각루 (방화수류정)
화성의 시설물 중에서도 아름다워 방화수류정이라고도 한다.
동북각루는 벽성의 서북 19보 용연(龍淵)의 위에 있다.
광교산의 한 쪽 기슭이 남으로 벋어내려 선암산이 되었다.
다시 서쪽으로 감돌아 몇리를 내려가 용두(龍頭)에서 그치고서 북쪽을 향하여 활짝 열렸다.
용두란 것은 용연의 위에 불쑥 솟은 바위이다.
성이 이곳에 이르면 산과 들이 만나게 되고 물이 돌아서 아래로 흘러 대천에 이르게 되니,
여기야말로 실지로 동북 모퉁이의 요해처이다.
장안문을 잡아 당겨 화홍문과 이어지게 함으로써 앞뒤로 서로 마주 응하여 1면을 제압하고 있다.
그리고 절벽을 따라 성을 쌓고 바위에 누를 세우니 편액은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이라 하였다.
[전 참판 조윤형(曺允亨) 씀]
동서로 세 간인데 가운데는 온돌을 놓았고 북쪽으로 한 간을 붙이고 남쪽은 반 간(半間)을 물리어 있다.
서쪽의 한 간은 또 길게 두 간을 늘리었다.
남쪽을 밖으로 물린 것은 마치 곡척(曲尺)처럼 생겨 있는데 평난간을 둘러쳤다.
그리고 위에 만(卍)자 쇄창(蔘)을 갖추었다.
온돌 4면에는 또 다시 만(卍)자 장자(障子)를 갖추었는데, 온돌의 면과 판자를 깐 면은 서로 판판하게 만들었다.
남쪽 동쪽 북쪽의 3모퉁이에는 5번 꺾인 팔각(八角)으로 각각 종횡의 짧은 대들보를 얹었다.
지붕 용마루의 네모진 서까래가 들쭉날쭉하여 처마를 번쩍 들고 있다.
지붕 용마루에는 망새[鷲頭]를 교착시켜 꽂았는데, 한 가운데에 3마디 절병통(節甁桶)이 까마득하게 솟아 있다.
동북쪽 평난간 밖에는 또 처마마다 판자를 깔아 성두(城頭)를 위압하고 있다.
2중으로 교란(交欄)을 설치하고 밖에는 전붕판문(戰棚板門) 16개를 설치하였는데,
만듦새는 마치 병풍을 포개어 친것 같다.
위에는 전안(箭眼) 각 1개씩을 내고, 아래에 총안 각 2개씩을 뚫었다.
단청은 5토를 사용하였으며, 대들보 위는 회를 발랐다.
내면에는 절지(折枝)를 그렸고, 정간(正間)의 조정(藻井)에는 연잎[荷葉]을 받쳤다.
동북 교란 아래의 성면 벽돌 높이 7척, 두께 4척 4촌, 위 아래에 총안 19개를 뚫고 널판지를 깔았다.
아래의 서남에도 벽돌을 돌려쌓아 담을 치고 담의 남쪽에 벽돌 홍예의 작은 문을 내었다.
동쪽의 물림난간 아래에도 판문을 내고 숨었던 적병의 발사에 대비하여, 포루의 제도와 같이 하였다.
정간 남쪽 처마와 층계로 누대를 만들되 돌을 깎아서 가장자리를 둘렀다.
누대의 높이 4척, 남북의 길이 13척 4촌, 동서의 너비 16척 4촌이다.
위에 방전을 깔아 우사(射)와 읍양(揖讓)의 예를 올릴 수 있을 정도의 면적을 유지시켰다.
대 위의 서북에 각각 고란층제(高欄層梯)를 놓아 정자의 위로 통하게 하였다.
대 아래의 동남 양면에도 4층 보석(步石)을 설치하고 그 남쪽 11보의 거리에 낮은 담을 쌓고 전문(箭門)을 내었다.
용연(龍淵)은 북성 밖에 있는데, 모양이 반달 처럼 생겼다.
둘레가 210보, 깊이 6척이고, 가운 데에 작은 섬이 있다.
못위 성모퉁이에 방화수류정이 있고, 정자 아래에 있는 바위는 옛날부터 용머리라 하여 낚시터로 삼을 만하다.
못의 서쪽에 석각 이두(石刻頭)를 설치하였는데, 물이 많이 차면 이 이두로 물을 화홍문 밖으로 뿜어 내게 되어 있다.
동암문
동암문은 동장대 서쪽 166보 되는 곳에 있다.
동쪽에 자리잡고 북쪽을 향하여 있으며 벽돌로 안과 밖의 홍예를 만들어 말 한필이 지나갈 수 있다.
안쪽 너비는 7척 높이는 8척이고 바깥은 너비가 6척, 높이가 7척 5촌이다.
문 위는 벽돌을 깔았고 누는 세우지 않았다.
다만 오성지와 한 개의 큰 둥근 여장을 설치하였는데 마치 나무로 만든 전붕(戰棚)의 제도와 같다.
좌우는 각각 비예를 갖추었고 안쪽은 평평한 여장을 설치하였다. 나
머지는 남암문과 같다.
동북포루(東北鋪樓)
동북포루(東北鋪樓)는 각건대(角巾臺)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방화수류정 동쪽 135보 4척쯤 되는 거리에 있다.
지세가 별안간 높아져서 용두(龍頭)를 눌러 굽어보고 있다.
성서(城書)에 이르기를, "치성의 위에 지은 집을 포(鋪)라 한다"고 하였다.
치성에 있는 군사들을 가려 보호하려는 것이다.
치성이 성 밖으로 18척 5촌이 튀어 나왔는데, 외면의 너비는 24척이고, 현안(懸眼) 1구멍을 뚫었다.
5량으로 집을 지었는데, 판자를 깔아 누를 만들었다.
7영(七楹) 3간이고, 높이는 여장 위로 6척 8촌이 솟았는데, 전체 높이는 13척이다.
여장의 3면은 모두 벽돌을 사용하였고, 여장 안은 벽등()을 이중으로 쌓았다.
아래 위에 네모난 총안 구멍 19개[사방 각 9촌], 누혈(漏穴) 11개[사방 각 4촌]을 뚫어 놓았다.
누의 위 4면에는 판문을 설치하고 외면과 좌우에는 사안(射眼)을 내어 놓았다.
내면에 벽돌 층계를 설치하여 오르내리게 하였다.
단청은 3토를 사용하였고, 들보 위는 회를 발랐다.
북암문
북암문은 동북각루의 동쪽 40보 되는 벽돌로 쌓은 성 사이에 있다.
안과 밖의 홍예 역시 벽돌로 쌓았다.
안쪽은 너비가 4척 6촌 높이가 6척 5촌이고, 바깥 쪽은 너비가 4척 높이가 6척이다.
문위에는 둥근 여장을 설치했는데 제도는 동암문과 같다.
홍예 사이에는 돌계단을 설치하여 들어가는 곳은 높고 나오는 곳은 낮게 만들었는데, 지세가 그러하기 때문이다.
서장대 (화성장대)와 서노대
장대와 노대
서장대(西將臺)는 팔달산의 정상에 선 망대로 사방 100리가 내려다 보인다.
정조는 이곳에 올라 군사훈련을 지켜보았다.
화성장대(華城將臺)라는 편액은 정조가 직접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서노대는 성 한가운데서 다연발 활인 쇠뇌를 쏘기 위하여 높이 지은 곳으로 정팔각형꼴로 전벽돌을 쌓아놓았다.
화홍문 (북수문)
수문
수원 화홍문(華虹門)은 아름다운 무지개 문‘이라는 뜻으로 경기도 수원시에 있는 수원 성곽의 북쪽 수문이다.
화홍문은 무지개 모양의 7개 홍예문 위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누각으로 지어져 있으며 누각의 건축면적은 52.89㎡이다.
또한 화홍문은 화성의 홍수를 대비하여 수원천 북쪽에 세워진 수문이다.
7개의 수문이 있고, 남수문과 달리 누각이 있다.
또 수원팔경 중의 하나이다
북수문은 편액에 화홍문[사인(士人) 유한지(兪漢芝)가 썼다]이라 되어 있다.
방화수류정의 서쪽 44보 되는 곳에 있다.
광교(光敎) 언덕을 대천(大川)이 가로로 자르며 흐르고 있어, 여름 장마 때마다 범람하는 환난이 있었다.
그래서 성을 쌓기 시작할 때에 물길을 내는 일을 먼저 하였다.
넓혀서 소통을 시키고 7간의 홍예로 된 돌다리를 하천 위에 걸쳐서 설치하였다.
그 동서로 3간은 아래 너비가 8척 높이가 7척 8촌, 가운데 한 칸은 너비가 9척, 높이가 8척 3촌이다.
7개의 안팎 홍예 사이에는 각각 좌우에 돌기둥 4개를 세웠다.
홍예가 서로 이어지는 부분에는 잠자리 무사를 붙였다.
중앙에는 장군형 무사를 덧붙였다.
거기에 다리 놓을 돌을 깔고 다리 위 바깥 쪽에는 장대석(長臺石)을 설치하였다.
아래의 전석에서부터 다리 밑까지 높이는 8척 7촌, 다리의 두께는 1척 9촌이다.
장대는 높이 1척이고 다리는 너비가 31척 길이 95척이다.
장대 위에는 누조(漏槽)[각각 너비 1척 깊이 5촌] 7개를 설치하고,
그 위에 벽돌을 쌓아 첩을 설치했으며, 타구는 설치하지 않았다.
높이는 5척 4촌 두께는 4척 8촌이고, 아래에는 방안 대포 구멍[사방 각 1척]을 뚫었다.
위에는 소포 구멍 14개[사방 각 7촌]를 뚫었다. 안쪽은 장대만을 두고 누혈(漏穴) 6개를 뚫었다.
동서 양끝에는 8면 돌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이무기를 새겼다.
서쪽 기둥의 북쪽과 동쪽 기둥의 동쪽에는 짧은 담을 쌓고 전판문(箭板門)을 설치하여 동쪽 성의 길과 통하게 하였다.
다리 위 북쪽 편에 누각 6간을 지었는데, 동서로 가로 너비가 3간이고 남북으로 세로 길이가 2간이다.
모두 널빤지를 깔았는데 첩의 위로 높이 솟아나오게 하여 사면에 분합을 달고 동서남 삼면에는 연잎을 새긴 난간을 붙였다.
난간 아래에는 벽돌을 둘러서 담장을 만들고 남쪽 한 가운데 1간을 비워서 들고 나는데 편하게 하였다.
방사(放射)하는 제도는 포루와 같다. 다리 위에서 널판지 깐 데까지 높이가 6척 2촌이다.
북쪽 분합 밖으로 물려깐 널위에는 전붕(戰棚)을 설치하였고 판문 아래에는 벽돌로 된 첩과 이어지게 하였다.
바깥 쪽에 짐승의 얼굴을 그리고 전총안(箭銃眼)을 뚫었다.
단확은 녹색을 바탕으로 하고 진채(眞彩)는 사용하지 않았다.
대들보 위에는 회를 발랐다.
누 남쪽 다리 위의 길은 너비가 5척이고 다리 아래 7개의 홍예에는 각각 쇠로 만든 전문(箭門)을 설치하였다.
줄로 양선(兩扇)을 걸어 당겨서 교면(橋面)의 석안(石眼)까지 꿰뚫고 지나가게 하였으며,
거기에다 고리를 설치하고 자물쇠를 달았다.
문 안의 양쪽 석축은 각각 길이가 6보 높이가 4척 5촌이다.
문 밖의 석축은 각각 길이가 5보 높이가 5척 5촌인데, 위로 성의 몸체와 이어져서 전체 높이는 16척이다.
이것이 실지로 내의 동쪽과 내의 서쪽이 서로 마주 서서 휘어 꺽여 원성(元城)이 되었다.
두 끄트머리는 전붕과는 좌우로 각각 29척이 떨어져 있는데,
여기에 또 좌우의 벽돌로 된 첩 위에 타구가 셋인 여장을 설치하여 담과 이어지게 하였다.
높이는 각각 4척 4촌이고 두께는 2척 2촌이다.
장안문
장안문(長安門)은 화성의 북문이자 정문이다.
보통 성(城)의 남문을 정문으로 삼으나, 화성은 임금을 가장 먼저 맞이하는 북문인 장안문이 정문이다.
잘 다듬은 화강암으로 쌓은 석축에 홍예문을 냈다.
그 위에 정면 5칸 측면2칸의 다포양식으로 이루어진 중층의 문루가 세워져있다.
또한 가운데에 홍예문이 나있는 벽돌로 쌓은 옹성이 있다.
양옆에 다른 성벽보다 높이가 약간 높은 두개의 적대를 설치하였다.
장안문의 이름은 중국의 옛 왕조인 전한(前漢), 수(隋), 당(唐)나라의 수도였던 장안(시안)에서 따온 것이다.
이는 당나라 때의 장안성처럼 화성 또한 융성한 도시가 되라는 정조의 뜻이 담겨 있다.
장안문[편액은 전 참판 조윤형(曺允亨)이 썼다]은 성의 북문이다.
행궁의 왼쪽 편인데 동쪽으로 780보되는 곳에 사좌(巳坐) 해향(亥向)으로 앉았다.
문의 안과 밖은 홍예로 되어 있다.
안쪽 홍예는 높이 19척 너비 18척 2촌이고, 바깥 쪽 홍예는 높이 17척 5촌, 너비 16척 2 촌, 전체 두께는 40척이다.
안쪽의 좌우에 있는 무사(武砂)[성석이 크고 잘 다듬어진 것으로 문 옆의 석면(石面)이 된 것을 무사라 한다]
각각 아래 너비가 67척 8촌, 높이가 23척 5촌,
왼쪽과 오른쪽의 와장대(臥長臺)는 각 32척 4촌, 섬돌은 각 23층 너비는 17척 2촌이다.
바깥 쪽의 좌우 무사는 각각 너비가 41척 높이가 23척 5촌이다.
안팎의 홍예문 사이에 있는 좌우 무사의 높이는 각 21척, 양쪽 선문(扇門) 안은 철엽(鐵葉)으로 하고 빗장을 설치하였다.
홍예의 덮개 판에는 구름 무늬를, 그리고 판 위에는 세 가지 물건[석회, 가는 모래, 황토]으로 쌓았는데, 두께는 4촌이다.
안팎의 홍예 위에는 장군 모양의 무사와 2층의 장대를 얹었으며 홈통[너비 1척 깊이 5촌]을 네 곳에 설치하였다.
안쪽의 평여장(平女墻)은 너비 88척 7촌, 높이 4척 3촌, 두께 2척 5촌이다.
바깥 쪽 여장의 높이 두께도 같으나 너비는 동서장 밖으로 각각 7척 4촌이 나왔다.
이 부분에서는 높이가 6척이 되어 옹성 위의 작은 홍예와 연결되며 타구(口)는 10개[첩(堞)은 11개]를 벌여 놓았다.
그리고 네모진 총혈(銃穴) 12개
[네모의 한 쪽 길이는 8촌이며, 첩마다 1 개를 뚫었고, 가운데에 있는 1개의 첩에는 2개의 총혈을 뚫었음]를 내었다.
동쪽과 서쪽의 여장은 너비 3척 5촌, 높이 5척 6촌, 중앙에 각각 작은 판자문을 두었는데 높이는 6척 5촌 너비는 6척이다.
장(墻) 안에는 2층의 누를 세웠는데 전체 높이는 32척 9촌, 아래 위 각각 10간(間), 가로 너비는 5간 세로 길이는 2간이다.
아래 층[안은 7포, 바깥은 5포] 정면 간의 너비는 22척 5촌인데, 바닥[높이 1척]에는 널판지를 깔았다.
오른쪽과 왼쪽 각각 둘 씩 협간(夾間)이 있는데 너비는 모두 12척이며, 세로 길이 2 간이고 전체 길이가 24척이다.
서쪽 협간의 첫째 간과 동쪽 협간의 두 번째 간에는 각각 곡란층계(曲欄層階)를 설치하여 위층으로 통하게 하였다.
서쪽 층계는 북쪽에서 올라가며 동쪽 층계는 남쪽에서 올라간다
[서쪽 층계 아래에 살문[箭門]이 있는데 잠가두었다가 임금이 오실 때에는 연다].
위층[안팎 모두 7포]은 정면의 간과 좌우 협간은 너비가 모두 하층과 같고 두 번째 협간은 각각 너비가 9척이며,
그 세로가 2간 전체 길이는 18척인데 모두 널판지를 깔고, 사면에 널판지 문을 달았다.
그리고 3면에는 모두 짐승의 얼굴을 그려 호로전안(葫蘆箭眼)[널판지마다 구멍이 하나씩 있다.
경(經)이 3촌 직봉(直縫) 역시 3촌이다]을 뚫었는데 안 쪽에는 태극을 그렸다.
단확(丹)은 3토를 사용하였다.
대들보 위에는 회를 발랐으며 문 안 서쪽 가에는 수문청을 별도로 세웠다.
[협도(夾刀) 넷을 세웠다]
북옹성은 장안문의 외성이다.
성서(城書)에는 옹성의 크기는 정성(正城)의 대소에 따르며 모양은 옹기를 반으로 나눈것과 같다고 하였다.
문위에 적루(敵樓)를 세우지 않는 것은 정성이 가로 세워져 있어 적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옹성은 정문 좌우의 무사에서 각각 7보 되는 곳에서부터 시작하여 벽돌을 쌓아서 성을 만들었다.
높이는 17척 안쪽 둘레는 159척 6촌 바깥 둘레는 209 척이고, 아래는 두께가 15척이고 위는 줄어 들어서 12척이다.
바깥 쪽에 현안(懸眼) 16개를 뚫었다[각각 길이 2척, 지름 2척 2촌].
안 쪽에 벽돌로 된 홈통 8개[지름 각 5촌]를 설치하였다.
옛 제도에는 왼쪽 혹은 오른쪽으로 한쪽 문만을 열었으나 지금은 사방으로 열리고 팔방으로 통한다는 뜻을 취하였다.
중앙에 문을 설치하여 정문과 마주하게 하였다.
양문의 사이는 10보 3척이며 돌로서 안팎으로 홍예를 만들었다.
안쪽의 홍예는 너비가 18척, 높이 19척이고 바깥 홍예는 너비가 16척 높이가 17척 5촌이다.
안팎 홍예의 사이는 좌우 높이가 21척이고 양 선문(扇門) 안에는 쇠로서 빗장이 설치 된 것이 정문과 같다.
홍예의 덮개판 위는 세 가지 물건으로 쌓고, 다시 여러 장의 벽돌로 쌓았다.
그 위에 오성지(五星池)[실정기(實政記』에 이르기를 오성지는 모양이 구유같고 5개의 구멍을 뚫었는데,
크기는 되(升)만 하다.
적이 문을 불태우려 할때 물을 내려보낼 수 있다]를 설치하였는데,
오성지 전체 길이는 14척 너비는 5척 깊이는 2척이고, 각 구멍의 지름은 1척이다.
오성지 위에는 성가퀴 9첩을 설치하였는데,전체 너비 38 척이고,그 좌우는 1층을 낯추어서 凸 모양의 성가퀴 7첩을 설치하였다.
너비는 각각 10척 2촌이며 높이는 모두 5척이다.
성과 만나는 곳에서 다시 凸의 반쪽 모양으로 층을 만들었는데 높이는 9척으로 각기 총안을 1구멍씩 뚫었다.
안쪽은 둘레가 평평한 여장으로 높이는 3척 5촌, 두께는 모두 2척 6촌이다.
옹성 위는 모두 네모난 전()을 깔고 좌우 끝에는 벽돌로 된 홍예에 작은 판문을 설치하여 성의 위와 통하게 하였다.
문의 양 옆은 평여장을 설치하였는데 높이는 10척 7촌이다.
북성의 적대는 2개로서, 각각 장안문의 좌우 53보 되는 곳에 있다.
옛 제도에는 70보 되는 곳에 1대를 세우고, 활화살 화창(火槍)을 대 위에 갖추어 둔다고 하였다.
성서에는 지금의 성은 화살과 탄환이 필요 없다고 하였다.
비록 창이나 선()으로 위로 찌른다 해도 전체 높이가 여유가 있고,
대의 양쪽 가장자리에서 지켜보고 있으면 적이 곧 바로 성 아래로 다가오지 못할 것이다.
또 포물선으로 날아오는 화살이나 비스듬히 날아오는 탄환도 대위에 있는 사람을 해치지 못할 것이라 했다.
대략 이 제도대로 하면 대의 높이는 2척으로, 원성의 성가퀴와 나란하고 반은 성 밖으로 나오고 반은 성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바깥 쪽의 아래 너비는 26척이고, 위로는 줄어들어 너비가 21척이다.
현안(懸眼)[각각 길이는 20척이고, 지름은 5촌이다]이 3개 있다.
좌우의 아래 너비는 각각 29척이고 위로는 줄어들어 너비가 24척이다.
凸 모양의 성가퀴로 둘렀는데, 바깥 3면은 11첩(堞)이 있는데 높이는 5척이고 두께는 2척 8촌으로 각각 총안[사방 6촌]을 뚫었다.
내면은 좌우 평평한 성가퀴에 각각 1첩씩인데 높이는 8척 이고
가운데 5척은 속이 비게 하여 돌계단을 설치하여 대 위와 통하게 하였다.
북동적대
적대는 성문과 옹성에 접근하는 적을 막기 위해 성문의 좌우에 설치한 방어 시설물이다.
포루와 치성은 성곽밖으로 완전히 돌출된 반면 이 적대는 시설물의 반만 외부로 돌출되고 반은 성안으로 돌출되어 있다.
적대는 성곽보다 높게 만들어서 적군의 동태와 접근을 감시하였으며
총안등을 만들어 유사시 적을 공격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북동적대는 장안문에서 동쪽으로 관통하는 도로를 건너있으며 1969년에 보수한 바 있다.
적대의 돌출길이는 8.9m 이고 폭은 6.55m이며 높이는 6.7m에 여장은 옥개부 밑까지 1.24m 이고 두께는 80cm 이다.
남측면에 돌계단 3 단을 두고 사방에 전돌로 여장을 둘렀다.
여장의 중심간의 길이는 남북으로 12.1m, 동서로 5.75m이며 凸형 여장이다.
성벽 전면에는 현안 3 개소를 두었다.
북서 적대
북서적대는 장안문의 북서쪽 약 62.5m 지점에 있으며 1795년(정조 19년) 화성 축성과 함께 축조되었다.
적대란 성곽의 중간에 약 82.6m의 간격을 두고 성곽보다 다소 높은 대를 마련하여 화창이나 활과 화살 등을 비치해 두었다.
한편 적군의 동태와 접근을 감시하는 곳으로 옛날 축성법에 따른 성곽 시설물이다.
화성 축성 때에는 이미 총포가 전쟁에 사용되던 때이지만, 옛날의 축성법에 따라 적대를 만들어 창과 활 대신 총포를 쏠 수 있도록 총안을 마련하였다.
이 적대의 규모는 높이 6.7m 성곽의 성가퀴와 가지런히 쌓되, 반은 성밖으로 나가 있고, 반은 안으로 들어와 있다.
아래 부분의 넓이는 7.8m이고 위는 좁아져서 6.4m인데, 거기에 현안 3개가 나왔다.
좌우의 아래 넓이는 8.8m 위는 7.3m로서, 이 적대의 상부는 凸자 모양으로 성가퀴를 둘러 쌓고있다
밖에 3면에는 높이 1.5m에 두께 85㎝의 성첩 11개를 쌓은 다음, 총안을 뚫어 놓았다.
또한 전면의 좌우에도 넓이 2.4m의 성가퀴를 쌓고,
그 안에 1.5m 폭의 공간을 만들어 적대위로 통과할 수 있게 만들어져 있다.
포루(砲樓)와 포루(鋪樓)
포루(砲樓)와 포루(鋪樓)는 헷갈리기 쉽다.
포루(砲樓)는 공심돈과 비슷하게 치성처럼 돌출시킨 시설이다.
남포루(南砲樓), 동포루(東砲樓), 북동포루(北東砲樓), 북서포루(北西砲樓), 서포루(西砲樓) 등이 있다.
포루(鋪樓)는 치성 위에 누각을 세운 것이다.
동북포루(東北鋪樓), 동일포루(東一鋪樓), 동이포루(東二鋪樓), 북포루(北鋪樓), 서포루(西鋪樓)등이있다.
치(稚)
치는 성을 돌출시킨 이며, 철(凸)자 모양으로 만들었다.
치(稚)라는 이름은 '꿩'이란 뜻으로 본래 꿩은 제몸을 숨기고 밖을 엿보기를 잘한다는 까닭에서 그 이름을 땄다.
남치(南稚), 용도일·이치, 서일치(西一稚), 서이치(西二稚), 서삼치(西三稚), 동일치(東一稚), 동이치(東二稚), 동삼치(東三稚) 등이 있다.
적대 (敵臺)
적대는 치와 비슷한 시설이며, 팔달문과 장안문 양 옆에 각각 두 개씩 있다.
북서적대(北西敵臺), 북동적대(北東敵臺), 남서적대(南西敵臺), 남동적대(南東敵臺)가 있다.
그 중 남서적대와 남동적대는 미복원이다.
북동포루
북동포루는 화홍문 서쪽 124보 3척쯤 되는 거리에 있다.
루는 대체로 5좌(座)가 있는데, 그 구조는 모두 똑같다.
성의 몸체에 凸 자 모양을 붙여 치성과 비슷하게 하고 집을 지었는데, 높이는 포(鋪)와 같다.
3층으로 하여 그 가운데를 비운 점이 마치 공심돈의 구조와 비슷하다.
모두 벽돌을 사용하여 만들었는데, 아래 넓이나 위의 줄어든 넒이가 모두 옛날 제도의 재돌(再突)하는 형세를 따랐다.
화포를 많이 감추어 두어 위 아래에서 한꺼번에 쏘게 하였다.
지대(地臺) 위에다 벽돌을 쌓고 집을 지었는데 5량을 성 밖으로 나오게하고 3영(三楹)으로 길게 하였다.
바깥 쪽 아래 너비 각각 24척, 위의 줄어든 너비 20척, 좌우의 아래 너비 각각 29척,
위의 줄어든 너비 27척, 높이 27척 5촌, 3면 벽 두께 6척, 높이는 들보와 이어져 있고, 두께는 처마 두께와 비슷하다.
바깥 쪽 지대의 위에는 일정한 간격을 두고서 대포 혈석 2개를 놓았다.
좌우 면에도 사이에 3개의 혈석[혈은 사방 각 1척]을 놓았다.
벽돌로 쌓은 공간 안에는 평지에서 위로 5척 되는 곳에다 벽에 의지해서 3면에 포판을 두르고 총혈 15개[사방 각 9촌]를 내었다.
또 포판을 두른 곳에서 10척 쯤 위에는 3간 누판(樓板)을 깔고 누의 위 3면에는 총안 15개를 뚫어 놓았다.
외면의 총안 위에는 또 전안 4개를 뚫었다.
좌우면에는 위쪽으로 벽돌을 뚫고 작은 판문 셋을 설치하였는데, 밖에는 짐승 얼굴을 그리고, 각각 전안을 뚫었다.
문 사이 벽면에는 쌍으로 전안을 뚫어 놓았다.
안쪽은 성탁(城托)에 의지하여 전부를 돌로 쌓고, 그 위에 판문을 설치하였다.
문지방 안의 청(廳)의 끝은 사방 4척쯤 비워서 별도로 덮개판을 설치하여 밀고 당겨 여닫게 하였다.
거기에다 나무 사닥다리를 대어서 아래쪽 공간으로 통하게 하였다.
누 위의 단청은 3토를 사용하였고 들보 위는 회를 발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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