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랜 역사가 그 자리에 멈춘 똘레도
똘레도는 마드리드에서 약 1시간 정도의 거리에 있다.
영화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의 배경이 된 도시다.
똘레도까지 가는 주변은 끝없는 들판뿐이다.
우리나라에서 지평선을 보기가 쉽지 않겠지만 이곳에선 어디서나 끝없는 지평선을 볼 수 있다.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풍경, 아름다운 주택단지들이 군데군데 그림처럼 펼쳐진다.
마을의 중앙에 언덕이 있고, 그 언덕에는 종탑이 있는 교회가 있다.
그 교회를 중심으로 작은 지붕들이 둘러싼 모습, 전형적인 전원도시의 모습이다.
그리고 그 주택주변으로는 광활한 농지가 있다.
2층~3층의 주택단지가 새로이 건립되고 있는 곳도 여럿 보였다.
아무리 높아야 5층을 넘지 않는 전원형 연립주택들이 정말 그림처럼 다가오고 있다.
붉은 스페니쉬 기와, 주변의 푸르름과 어울려 한 폭의 그림이다. 달력속의 사진 모습이다.
매일같이 초고층 아파트, 복잡한 도시풍경에만 익숙한 나에게 생수 같은 기분이었다.
가끔은 집시마을도 보였는데 아름다운 마을에 비하면 매우 초라한 모습이었다.
정부에서는 이들 집시를 보호하기 위해 연금도 주고 주택도 제공한다.
그러나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떠돌아다니는 것이 몸에 배어 금방 나와 버린다고 한다.
아파트를 나올 때에는 문짝이나 변기, 수도꼭지마저 떼어가 버리기 때문에 정부는 골머리를 앓는다고 했다.
똘레도는 인구 5만이 거주하는 작은 도시이다. 418년 비시고도인들이 왕조를 세우고 579년에 이곳을 수도로 정했다.
카톨릭을 국교로 정한 똘레도는 정치적인 중심지이지만 종교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711년 아랍제국에 의해 침략을 받은 지 약 400년간 이슬람의 지배를 받게 된다.
그 후 1087년 알폰소 6세에 의해 수복되어 똘레도는 가스띠야 왕국의 수도가 되었다.
똘레도의 전성기는 13세기로 산 페르난도 3세, 알폰소 10세에 의해 발전을 거듭하게 된다.
1492년 카톨릭 국왕은 스페인에서 유태인을 추방하게 되는데,
당시 상권을 장악하고 있는 그들이 떠남에 따라 똘레도 경제도 사양길에 접어들게 되었다.
그 후 1561년 마드리드로 수도를 옮기면서 똘레도는 정치적으로도 중요성을 잃었다.
사실 똘레도가 한 나라의 수도로서는 입지적인 문제가 많은 곳이다.
강으로 둘러 싸여 고립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인구도 5만을 넘기기 어려울 정도로 작은 곳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식수를 확보하는 문제도 쉬운 것 같지가 않다.
그래서 수도를 옮길 수밖에 없었다.
그 바람에 똘레도는 옛날의 모습을 그대로 보존할 수 있었다.
이곳에 들어 선 순간 마치 중세도시에 들어선 기분이다.
옛 모습 그대로를 잘 유지하고 있는 곳이다.
정치적으로는 중요도를 잃었지만 종교적 위상만은 지금까지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이곳에서 5세기 이후 수많은 종교회의(Concilio)가 개최되었고,
13세기 초부터 15세기 말에 걸쳐 똘레도 대성당이 건설되어 지금도 스페인의 수석 성당으로 사용되는 역사를 간직한 곳이다.
19세기에 설치된 사관학교,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곳이었다.
@ 대성당(Catedral)
스페인 카톨릭의 총본산인 대성당은 1226년 착공하여 266년간의 공사기간을 거쳐 1493년에 완성하게 된다.
길이 113m, 폭 57m, 높이 45m로 그후 상당부분 증개축을 거쳐 오늘에 이르게 된다.
1086년 알폰소 6세에 의해 수복되기 전까지는 이슬람의 사원으로 사용되던 곳이었다.
정면에는 당초 2개의 종탑으로 계획하였으나 1개만 건축하였다.
외부는 물론이고 내부의 세부장식은 상상을 초월하게 하는 정교함을 갖고 있다.
어떻게 돌을 종이처럼 주무르고 만들었을까 생각하니 소름이 끼친다.
당시 종교의 힘(그것이 권력의 힘이던 신심이던 관계없이)이 얼마나 강했으면 이런 작품을 만들 수 있었을까.
전시된 보물 중에는 금실·은실로 수를 놓고,
루비·홍옥·사파이어·터키석·진주들로 장식한 아름다운 대형 망토가 있었는데,
당초 왕비가 사용하던 것을 추기경에게 선물로 준 것이라는 안내원의 설명이다.
왕권이 교회로 힘에 밀리기 시작하면서 생기는 일이었다고 한다.
왠지 서글프다. 그 외에도 상당히 많은 보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눈에 띄는 것으로 손으로 쓴 책이다. 당시 인쇄술이 발달되지 않았을 때이니까 손으로 쓸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얼마나 정교하고 아름답게 만든 것인지 눈으로 보지 않고는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지금의 인쇄물보다 품위가 있고 귀중함을 간직하고 있다.
그런데 이 성당이 생각보다 관리가 잘 안되고 있다는 점이다.
실외는 물론이고 실내도 균열이 진행되는 등 심각한 수준인 것 같다.
물론 곳곳에 보수를 하고 있지만 그 비용이나 기간 등을 감안한다면 만만치 않은 문제인 것 같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닌 것 같다.
문화재를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 것인가 생각하게 하는 장면이다.
@. 알카사르(Alcazar)
마을의 중앙 세르반테스 언덕에 위치한 알카사르는 알폰소 6세가 11세기에 똘레도를 이슬람으로부터 수복한 직후 재건축을 하게 되고, 13세기 알폰소 10세가 증․개축을 하게 된다.
처음에는 왕궁이나 왕가의 숙소로 사용하기도 했고, 감옥으로도 사용되기도 했다.
1810년 나플레옹 군대에 의해 불에 타서 폐허가 되었고, 그 이후 보수공사를 하여 1883년 사관학교로 용도가 바뀌게 된다.
그러나 1936년 스페인 내란당시 공화파에 의해 폭탄세례를 받아 완전 폐허가 되기도 했다.
전쟁이 끝난 후 새로이 보수하여 오늘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고 한다. 우리는 멀리서 눈으로만 감상할 수밖에 없었다.
@. 골목길 풍경
인사동 골목길을 걷는 기분이다.
물론 그보다 더 오래된 모습과 냄새가 나는 곳이긴 하지만 골목을 돌면 금은 세공점포가 보이고 막히는가 하면 새로운 골목이 삐죽이 고개를 내미는 형국이 마치 인사동 골목길 풍경을 연상케 한다.
넓어지는가 하면 좁아지고 트인 모습인가 했는데 막히고, 어릴 적 숨바꼭질하는 기분이다.
그러나 몇몇 건축물은 무너지기 직전이다 너무 낡아서 당장 손을 보지 않으면 사고가날 지경인 건물도 가끔 보였다.
가회동 한옥을 보전하는데 애로가 보수비용이다. 아파트 평당 건축비가 300만원을 넘지 않는데 비해 한옥을 보수하는 비용은 평당 650만원을 넘는다는 점이다.
이를 개인부담으로 유지하도록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고, 결국 시가 일정부분을 지원해 줌으로 한옥으로 유지할 수 있는 것처럼 이곳에서도 그러한 지원대책이 있는지 모르겠다.
@. 전통적인 금세공 산업
똘레도의 역사만큼 금세공 기술도 연륜을 갖고 있다고 한다. 장인의 손놀림을 보면서 금세공 제품이 비쌀 수밖에 없음을 이해하게 되었다.
마음에 드는 작은 접시를 한점 살려고 했더니 200~300유로(약 28만원~42만원)를 달라고 한다.
그보다 품질이 떨어지는 작품은 60유로(8만원 정도)이지만 눈에도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조잡했다.
결국 아이쇼핑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 산또 또메 성당(Iglesia de Santo Tome)의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
똘레도 지방의 귀족으로 왕국의 수석 공증인으로 있던 오르가스 백작(Conda de Orgaz)은 일생동안 성당에 재정적인 지원을 하는 등 믿음이 신실했고,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많이 도와주었던 사람이다.
그가 1323년 사망을 하면서 자신의 유산을 성당의 가난한 성도들과 성당의 빚진 돈을 갚을 수 있도록 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의 죽음을 기리기 위해 1586년 엘 그레꼬(El Greco)에게 의뢰하여 전설처럼 내려오던 그의 장례식 장면을 그리도록 했는데 9개월 만에 완성했다고 한다.
우리는 이 그림 한점을 보기 위해 별도의 입장료를 지불하고 산또 또메 성당을 관람했다.
그만큼 똘레도 지방 사람들에게 있어 추앙받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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