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슈비츠 포로 수용소-국립 오시비엥침 박물관-폴란드
독일의 폴란드 침공...
아우슈비추....폴란드의 오시비엥침 지명을 독일어로 아우슈비츠라 부른다.
1939년 9월 1일 새벽 4시 45분.
암호명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로 명명된
작전명령이 떨어지자 숙달된 히틀러의 정예부대는 침략전쟁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폴란드 친선방문으로 위장한 독일 연습선
슐레스비히-홀슈타인 호의 모든 포문은 폴란드의 단치히 동쪽 해안을 향해 일제히 열렸다.
바야흐로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사전 밀약에 따라 폴란드 국경의 서쪽은 독일이, 동쪽은 소련이 쳐들어와 폴란드 영토를 절반씩 차지해 버렸다.
개전 꼭 한 달 5일 만에 폴란드에서는 총성이 그치고 절반의 영토가 독일 제3제국에 편입되었다.
전략적 요충지 아우슈비츠
독일이 폴란드를 점령할 때 가장 먼저 작전을 펼친 곳은 오시비엥침-브레제진카(Oswiencim-Brezezinka)였다.
독일은 이곳을 점령하고 난 후 지명을
독일식 발음으로 고쳐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Auschwitz-Birkenau)라고 명명했다.
독일이 오슈비엥침을 제일 먼저 점령한 데에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오슈비엥침은 폴란드에서 가장 중요한 중화학공업 지역이었다.
전쟁을 수행하는 데 중화학공업의 필요성은 절대적이었기 때문에
전쟁 중 폴란드가 군비를 정돈하여 재반격할 수 없도록 오슈비엥침을 제일 먼저 점령해야만 했다.
둘째, 이곳은 폴란드의 야전군 사령부가 있었던 곳이다.
야전군 사령부가 힘을 쓰지 못하게 하려면 개전초
전광석화와 같이 빨리 점령하여 야전군 사령부의 기능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밖에 없었다.
셋째, 오슈비엥침은 지형적으로나 전략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곳이었다.
오슈비엥침은 주위에 강이 흐르고 있고,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마치 섬과 같이 보이는 외딴 지역이었다.
나중에 이곳에 수용소가 만들어지고 난 후 경비도 철저했지만 지리적인 자연 조건이 탈출을 사실상 불가능하게 했다.
또한 유럽 지도를 펴놓고 볼 때,
아우슈비츠를 중심으로 원을 그리면
영국과 러시아 모스크바를 포함하여 유럽 모든 나라들이 원 안으로 들어오게 된다.
북쪽의 스칸디나비아 끝에서 아우슈비츠까지는 약 2,100㎞,
남으로 그리스의 수도 아테네까지는
약 2,200㎞인 것으로 보아 전 유럽의 중심이 바로 이 아우슈비츠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독일이 아우슈비츠를 점령한 후 수용소를 만들기는 1940년 초였다.
처음에는 폴란드의 정치범을 수감하기 위해서 만들었다.
이곳에 수용된 사람은 폴란드 지하단체 활동가나 지식계급, 국가의 지도자급 인물들이었다.
여기에서 처형된 폴란드의 정치범들은 10만 명 가량이었다.
그러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나치는
유럽 각국의 국적을 얻은 유태인 집시 소련군 포로 들을 이곳에 보내오기 시작했다.
제1수용소 정문
이문을 통해서 매일 강제 노동에 끌려나간 수감자들은 하루 12시간이상 씩 일을 해야만 했다.
수감자들이 강제노동에 나가고 들어올 때에는, SS대원이 몇 천명이 나 되는
수감자들의 행진을 용이하게 통제할 수 있도록 취사장 옆 조그만 광장에서 수용소 오케스트라가 행진곡을 연주 했다.
아우슈비츠 정문에는 독일어로
“ARBEIT MACHT FREI”(일하면 자유로워진다)라는 기만적인 문구가 쓰여있다.
수감된 사람들 중엔 체코인, 슬로바키아인, 구 유고슬라비아인, 프랑스인, 오스트리아인 그리고 독일인이 있었다.
이와 같은 수용소는 전 유럽에 1천여 곳이 있었지만
그 중에서 제일 규모가 크고 시설투자를 가장 많이 한 곳이 아우슈비츠 수용소였다.
제11블록 (죽음의 블록)
좌측:10블록 유리창이 막혀 있음, 가운데 : 죽음의 벽,우측: 죽음의 블록
제10블록과 제11블록 사이의 공간은 양쪽에서 높은 벽으로 막혀 있다.
제10블록의 창문에 붙은 나무 판은 이 공간에서 자행된 사형집행을 볼 수 없게 하기 위해서 만들어 졌다.
이 “죽음의 벽” 앞에서 SS대원들은 수 천명의 수감자들(주로 폴란드인)을 총살 시켰다.
제 11블록은 수용소에서 격리된 형무소였다.
죽음의 벽
입구에서 우측 첫 번째 방은 SS대원이 근무했던 방이다.
그 밖에 방에서는 입시재판을 기다리던 수감자들이 감금되었다.
임시재판관은 인근 도시에서 와서 좌측 첫 번째 방에서 2-3시간 동안에 수십에서 수백 명에게 사형 판결을 내렸다.
1층 1호실
처음 수용소로 들어올 때 수용소 관리국장으로부터 “너희들이 출구 화장터의 연기 하나밖에 없다”는 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의복과 소지품들을 빼앗기고, 3가지 포즈의 사진을 찍어야만 했다.
1943년부터 왼쪽가슴에 죄수번호 문신을 새겼는데, 죄수번호를 문신한 곳은 아우슈비츠 수용소 뿐이었다.
줄무늬 죄수 복은 천이 얇아서 혹독한 추위로부터 수감자들을 지켜 줄 수 없었다.
속옷은 몇 주 또는 몇 달간 세탁도 못하고 갈아 입지도 못했다.
그것은 여러 가지 전염병이 유행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특히 티푸스와 옴 병이 유행하였다.
1층 6호실
수용소에서 끌려온 사람들이 가지고 온 물건들은 철저하게 분류되어
SS나 군인, 일반시민이 이용하기 위해 창고에서 독일 본국으로 운반되었다.
물론 독살된 사람들의 물건을 SS대원들이 사용하기도 했다.
수감자들로부터 빼앗은 물건들을 실은 열차가 잇달아 본국으로 향해갔지만,
수용소의 창고에는 언제나 미처 분별작업을 하지 못한 물건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소련군이 오시비엥침에 접근해 옴에 따라, 창고에서 가치 있는 물건들을 본국으로 운반하는 속도가 빨라졌다.
개방되기 전날, 범죄의 흔적을 없애기 위해 SS는 창고에 불을 질렀다.
그 결과 35개의 창고가 있는 블록(일명 캐나다 ) 중에 6개의 창고만 남아서,
그 안에 있던 몇만 켤레의 신발과, 브러시 종류, 의복, 안경 등이 발견 되었다.
제5 블록
이 곳엔 개방 후에 발견된 희생자들의 소지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소유자의 이름 주소 생년월일이 적혀 있는 트렁크, 브러쉬 종류, 신발, 식기, 신체장애자의 의수족 등이다.
특히 전시되어 있는 어린이들의 옷과 신발, 우유병 등은 관람자들을 안타깝게 한다.
싸이클론 비(Cyklon B) 라는
독가스는 독일 데게슈(Degesch)사가 생산해서, 1941년부터 1944년 까지 약 30만 마르크의 이익을 내었다.
Cyklon B : 흰색 돌 같은 결정이 공기와 접촉하면 독가스를 발생시킨다
아우슈비츠에서만 1942년부터 1943년까지 약 2만kg을 사용하였다.
수용소장 루돌프 회스의 증언에 따르면, 약 1,500을 죽이는데 6-7kg의 독가스가 필요하다고 했다.
소련군에 의해서 해방 후 수용소 창고에는 사용된 싸이클론 비의 빈통이 산더미처럼 쌓였는데, 그 중에는 내용물이 들어있는 통도 있었다.
전시실에는 싸이클론 비의 결정과 데게슈사에 보내졌던 가스 운반 명령서 몇 장이 전시되어 있다.
2층5호실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구 소련군에게 개방되었을 당시, 창고에서 자루에 넣어진 약 7톤의 머리카락이 발견되었다.
그것들은 본래 수용소 당국이 독일본국에 있는 공장에 보내기 위해 모아놓은 것이다.
전문가들의 연구에 의해 머리카락에서 사이클론 화합물의 독성 원소가 발견되었다.
독일의 공장에서는 그 머리카락을 이용해서 매트리스와 천 등을 제조하였다.
그리고 사체에서 뽑아낸 금 이빨 등을 녹여서 막대모양으로 만들어 독일 중앙 위생국에 보내졌다.
화장시킨 시체의 재는 비료로 사용되거나, 가까운 곳의 하천, 연못 등지에 버려졌다.
제5 블록
이 곳엔 개방 후에 발견된 희생자들의 소지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소유자의 이름 주소 생년월일이 적혀 있는 트렁크, 브러쉬 종류, 신발, 식기, 신체장애자의 의수족 등이다.
특히 전시되어 있는 어린이들의 옷과 신발, 우유병 등은 관람자들을 안타깝게 한다.
제7블록
이곳엔 수감자들의 위생을 알 수 있는 생활상을 보여 주는 곳이다.
40-50명이 잘 수 있는 방에 통상 200명의 수감자가 생활을 했다.
지푸라기 위에서 자던 침상,
나중에 머리카락으로 만들어진 모포를 이용한 생활,
쥐와 벼룩 등이 들 끌어 많은 병을 가질 수 밖에 없었던 모습들을 보여주고 있다.
반면에 SS에 협력했던 앞잡이(카포)들은 자신의 방을 가질 수 있었다.
그리고 이곳에선 갖가지 생물학적인 실험을 자행한 증거들은 공개 하고 있다.
예를 들어 슬라브인들을 말살하기 위해
남녀 단종실험(성기절단실험)을 하였고 쌍둥이와 신체 장애자들을 이용하여 잔인한 실험을 하였다.
가스실/ 소각로
화장터는 수용소를 둘러 싸고 있는 철조망 바깥에 있다.
그 입구 앞에는 1947년 4월 16일 수용소장 루돌푸 회스를 사형 집행한 교수대가 있다.
가스실은 초창기엔 시체안치소 였었다.
1941-1942년 말까지 소련군 포로와 실레지아 지방의 게토에서 연행되어온 유태인들을 독살 했다.
뒤쪽 방에는 시체를 태우기 위한 두 대의 소각로가 남아 있다.
원래 3대의 소각로를 이용하여 하루에 350구의 시체를 태웠다.
가마 자체는 독일 “도프 운트 쇠네”(Dorf und Sohne)사가 제작 했다.
이 회사는1942년과 1943년에 브졔진카 제2수용소에서도 4간의 화장터 가마를 설치 했는데 회사명이 가마 한쪽에 적혀 있다.
이 화장터는 1943년까지 가동 했다.
아우슈비츠 포로 수용소 소장 사택이다.
제2수용소 죽음의 문과 철로
아우슈비츠 - 제2 수용소
제1 수용소에서 3km 떨어진 “브졔진카”라는 마을에 만들어졌다.
아우슈비츠 제2 수용소, 비루케나우(브졔진카의 독일식 명)가 설립되었다.
면적이 약 53만평으로 300동이상의 건물들이 있었다.
이 건물들 중 지금까지 완정한 형태로 남아 있는 것은 벽돌건물과 몇 개의 목조 건물 뿐이다.
그곳에선 SS장교와 SS의사인 요제프 멩겔레 박사와 마주치게 된다.
일할 능력이 있는 사람들은 오른쪽으로, 병자와 노약자,
그리고 키 작은 어린이(이때 살기 위하여 어린이들은 발뒤꿈치를 들고 지나가기도 한다)들은 왼쪽으로 분류되었다.
이곳 병원에서 생체실험에 몰두했던 멩겔레 박사는 엄지손가락으로 왼쪽, 오른쪽을 표시하여 유태인의 생사를 갈라놓았다.
수용소 소장 루돌프 회스의 증언에 따르면 운송되어온 사람의 70-80%는 가스실로 보내어 졌다고 한다.
헝가리에서온 유태인들을 학살 할 당시에 SS대원이 촬영한 약 200매의 사진 중에서, 수십 장의 기록사진이 전시되어 있다.
타버리거나 파손된 건물들은 가운데 굴뚝만 앙상하게 남아 있으며 그 수용 규모가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다.
벽돌 건물들은 여성 수감자들이 사용했다. 3층 침대의 썩은 짚단 위에서 밤을 보냈다.
침대 한 층엔 8명씩 사용했다. 목조건물은 마구간을 개조해서 100명을 수감하기 위해 만들었다.
1944년 8월 점호 때 수감자의 수는 남녀 합해서 약 10만 명에 달했다.
식수 부족과 비위생적인 수용소에 쥐의 대량 발생은 수감자들의 생활을 악화 시켰다.
수감자들은 영하 20도의 추위와 강한 바람에도 얇은 죄수 복과,
건물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허술한 난방용 굴뚝에 의존한 채 겨울을 보냈다.
나
나치는 대부분의 학살 장비를 이곳에 설치 했다.
4동의 화장터와 가스실로 개조된 농가들, 시체를 태우기 위한 야외소각장이 그 것이다.
철도가 끝나는 지점에는, SS 대원들이 후퇴하면서 범죄의 흔적을 없애기 위해 폭파한 2동의 화장터와 가스실이 무너진 채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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