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유럽-독일-프랑크푸르트(Frankfur)암 마인
독일 헤센 주에서 가장 큰 도시.
운하로 바뀐 마인 강이 라인 강과 만나는 마인츠에서 상류로 30㎞쯤 올라간 곳에 있다.
켈트족과 게르만족이 BC 1세기부터 이 지역에 살았다는 증거가 남아 있고, 1, 2세기의 로마 유적도 보존되어 있다.
프랑크푸르트('프랑크족의 통로'라는 뜻)라는 이름은프랑크족이 알레만니족을 남쪽으로 몰아냈던 500년경에 생겨난 것으로 여겨진다.
이곳을 프랑코노푸르트(Franconofurt)라고 처음 문헌에 기록한 사람은 8세기말 샤를마뉴의 전기작가 아인하르트이다.
팔츠('왕궁'이라는 뜻)는 9세기에 동프랑크 왕국을 다스린 카롤링거 왕조의 별궁이었다.
프랑크푸르트에서 처음으로 황제가 선출된 것은 856년이었다.
1372~1806년에 자유제국 도시였다가 그후에는 라인 동맹의 군주이자 대주교가 거주하는 행정중심지가 되었다.
1810년에는 나폴레옹이 창설한 프랑크푸르트 대공국의 수도가 되었다.
나폴레옹이 몰락한 1815년부터 이 도시는 다시 자유시가 되었다.
1816~66년에는 독일 분데슈타크(연방의회)의 소재지이자 독일의 수도가 되었다.
1866년 전쟁이 끝난 뒤 프로이센에 합병되어 자유시의 지위를 잃어버렸다.
옛 시가지는 제2차 세계대전 때 대부분 파괴되었지만, 1945년 이후 근대적인 건물이 많이 세워졌다.
유서 깊은 건축물로는 1400~28년에 세워진 에센하이머 탑(47m)과....
1239년에 성 바르톨로메오에게 봉헌된 붉은 사암으로 만들어진 성당이다.
그리고 오래된 시청 건물인 뢰머가 있다.
뢰머 광장(Römerberg)
프랑크푸르트암마인의 구시가지 중앙에 위치한 광장이다.
''뢰머(로마인)'' 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 것은 고대 로마인들이 이곳에 정착하면서부터인데 15~18세기의 건물들이 몰려 있다.
광장 주변에는 구시청사와 오스트차일레가 있다.
구시청사는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대관식이 끝난 후에 화려한 축하연을 베풀었던 유서깊은 곳이다.
프랑크푸르트 최초의 박람회가 열린 곳이기도 하다.
오스트차일레 1405년부터 시청사로 사용되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 때 파괴되었다가 재건되었다.
구시청사 맞은편에 있는 목조건물들을 통칭 오스트차일레라고 한다.
본래는 15세기에 쾰른의 비단상인들을 위해 지어진 것이라고 한다.
시청사 앞의 뢰머 광장 중앙에는 한 손에는 칼, 한 손에는 천칭을 들고 있는 ‘정의의 분수’가 있다.
‘정의의 분수’앞에서 한 컷
프랑크푸르트의 명소 - 오래된 시청 건물인 뢰머(Romer)시청 청사이다.
1405년 프랑크푸르트 시의회가 귀족의 저택 3채를 사들여 시청사로 개조해 사용한다.
이 중에서 가운데 1채를 뢰머로 불렀다.
뢰머는 역대 황제들이 연회를 베풀던 곳이다.
2층의 넓은 홀은 1562년 프랑크푸르트에서 처음으로 황제 대관식이 거행된 이래 ‘황제의 넓은 방’으로 불린다.
이 곳에는 역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52명의 초상화가 걸려 있으나, 관광객에게는 공개하지 않고 있다.
시청사 앞의 뢰머 광장 중앙에는 한 손에는 칼, 한 손에는 천칭을 들고 있는 ‘정의의 분수’가 있다.
광장 남쪽에는 니콜라이 교회(Nicolaikirchen)가 있다.
오래된 시청 건물인 뢰머이다.
프랑크푸르트암마인 니콜라이교회[Frankfurt am Main Nikolaikirche ]
독일 헤센주(주 ')">州) 프랑크푸르트암마인에 있는 교회.
뢰머베르크(Romerberg)의 광장 남쪽에 위치한다.
1920년부터 14세기까지 왕실 예배당으로 사용되다가 15세기에 시 정부 소유의 예배당이 되었다.
본래 고딕 양식의 건물이었다가 여러 차례의 보수 공사를 거쳐 후기 고딕 양식의 건물로 변화되었다.
전체적으로 단아하고 고풍스러운 느낌을 준다.
흰색 외벽과 빨간 벽돌의 조화가 재미있기도 하고 아름답기도 하다.
밤이 되면 교회 전체에 조명이 비춰져 아름다운 야경을 감상할 수 있다.
프랑크푸르트암마인 역사박물관[Frankfurt am Main Historisches Museum ]
마인강(Main River) 북쪽에 있는 유일한 박물관으로, 운터마인 다리를 건너면 바로 앞에 있다.
중세에서 현대에 이르는 프랑크푸르트의 문화 예술을 소개하고 있어 프랑크푸르트암마인의 역사를 더듬어 볼 수 있다.
상설 전시실에는 그림, 사진, 기록 문서, 포스터, 장난감, 조각, 가구, 무기 등이 시대별로 나뉘어 있다.
특별 전시실로는 100년 전의 학교 모습과 교과 과목, 놀이 등을 소개한 어린이 박물관이 있다.
전시물 중에는 카를 4세의 금인칙서 복사본도 있어 역사에 관심이 많은 사람에게 좋은 볼거리를 제공한다.
로비에는 제2차 세계대전으로 파괴되기 전의 프랑크푸르트암마인의 모형이 전시되어 있다.
이 도시는 괴테의 도시로도 유명하다.
이후 마인 강과 라인 강의 수상교통의 중심지이다
또 철도의 중심지로 상공업이 크게 발달하게 되었으나,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시가지가 크게 파괴되었다
마인강(Main River)
프랑크푸르트 시내를 동서로 관통하는 프랑크푸르트의 상징적인 강으로, 하류에서 라인 강과 합류한다.
날씨가 좋은 날에는 일광욕을 하러 나온 시민들로 북적거린다.
강의 중류와 하류는 배가 다닐 수 있는데, 특히 프랑크푸르트를 중심으로 하는 하류 지역은 중요한 교통로로 이용된다.
강물은 그다지 깨끗하지 않은데, 비가 많이 오는 봄이면 강변이 자주 침수된다.
마인 강 남쪽 주변에는 박물관과 미술관이 많이 모여 있어 ‘박물관 거리’로 불리는데, 유명 화가들의 작품도 볼 수 있다.
또, 고풍스런 옛 집들과 카페들이 들어서 있어 그냥 강가를 거닐어도 좋다.
토요일에는 강변을 따라 벼룩시장이 열려 볼거리와 먹거리가 풍성하다.
이곳 벼룩시장은 독일에서도 규모가 큰 편에 속하는데, 잡다한 것에서 자동차까지 거래된다.
볼거리가 많은 마인 강 북쪽 강변에서 남쪽 강변까지 도보로 건널 수 있는 보행자 다리가 있다.
차일 거리(Zeil)
금융기관들이 밀집해 있으며, 카우프호프(Kaufhof) 백화점을 비롯한 대형 쇼핑몰, 레스토랑 등이 줄지어 늘어 서 있다.
카우프호프 백화점 옆에 있는 차일 갤러리에 올라가면 시내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차량 통행을 제한한 보행자 거리로 유명한데, 노점상에서 굽는 소시지와 와플의 향기가 미각을 자극하고있다.
거리의 공연들은 지나가는 행인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거리 주변에는 역사적인 건물들이 많이 모여 있다.
1729년에 감옥으로서 지어진 하우프트바헤(Hauptwache) 건물,
괴테의 생가인 괴테 하우스(Goethe Haus), ‘뢰머’로 불리는 구 시청사 건물 등 볼거리가 많다.
프랑크푸르트는 독일의 대표적인 상업, 금융도시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정작 실제로 와본 느낌으로는, 차라리 베를린(구서베를린)에서 풍겨오는 것이 더 금융도시의 분위기이다.
그렇게 프랑크푸르트는 그지없이 깔끔하지만, 조금 조잡한 도시라는 인상이다.
베를린에서 곧장 기차로 프랑크푸르트에 닿으면, 어딘가 낡은 도시로 들어서는 듯하다.
그러고 보면, 저 대문호 괴테가 태어난 도시로서, 오랜 고도(古都)임을 새삼 확인하지 않을 수 없다.
중세 때 신성 로마제국 황제의 선거나 대관식 등, 중요한 의식이 거행되기도 했던 도시답게, 대성당의 모습도 장중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뭐니뭐니, 프랑크푸르트로 왔으면, 괴테의 집을 놓칠 수가 없다.
그런데 이 괴테 하우스와 괴테 박물관에서 받는 느낌도, 프랑크푸르트 도시의 첫인상에서 풍겨오는 느낌과 대동소이하게 고색 창연하다.
가령,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푸슈킨의 집을 돌아본 느낌을 퍽이나 싱싱하고 선열하다.
살아 생전의 푸슈킨이, 바로 손 닿는 곳에 느껴진다.
가구 하나 하나, 서재 벽에 걸려 있는 카프카스의 정경 그림, 심지어, 미인으로 알려졌던 아내의 자매들이 기거했던 방까지도,
그녀들이 살아 생전의 분위기가 와락 다가온다. 그렇게 강렬했다.
또, 같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도스토예프스키가 살갗 가까이 풍겨온다.
푸슈킨의 집은, 귀족이었던 푸슈킨답게 우아하고 귀품이 도는데 반해서, 도스토예프스키 집은,
생전의 도스토예프스키답게 시정의 장사치 냄새가 풍기고 조금 우중충하게 천티가 난다.
모스크바의 톨스토이 집이나 체호프의 집도, 그 작가들의 인품이 살갗 가까이 다가오게 매우매우 실감이 난다.
늙은 톨스토이가 아침마다 아령을 했다는 그 아령이며, 자전거며,
늙어서 건강관리에 힘을 쓰던 톨스토이의 치기스런 면까지도 손에 잡힐 듯이 느껴지고, 체호프의 왕진가방도 새삼 일말의 감회를 불러일으킨다.
그런데, 웬일인가. 괴테의 집에서는 그런 것이 전혀 안느껴지고, 모두가 뿌우옇게 고색 창연할 뿐이다.
제2차 세계대전의 폭격에 의해 거의 완전하게 파괴되어 버렸던 것을 전후에 매우 충실하게 복원시켜서,
독일 복구기술의 최고 걸작품이라고까지 일컬어지고 있음에도,
그리고 생활용품들은, 전쟁 전에 미리 소개시켜 전쟁의 재화에서 모면될 수 있었다고 하는데도,
어쩐 일일까, 러시아의 푸슈킨, 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 체호프의 집에서 풍겨오는 그 강렬한 현장감이 도무지 안 느껴진다.
괴테가 1749년생으로, 푸슈킨보다 50년 앞선 때문이었을까. 우리나라의 영조(英祖) 25년이 된다.
그러나 괴테는 83세까지 장수했으나 37세로 요절했던 푸슈킨과 어슷비슷하게 19세기 초반을 살아냈던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괴테의 집에서만 유난히 느껴지는 이 고색 창연함은 무슨 이유일까.
그것은 바로 이 프랑크푸르트라는 도시의 고도(古都) 분위기와 그대로 연결되는듯 싶다.
저 중세 로마의 노상 복닥복닥 먼지가 날리는 듯한 고도 속에 자리해 있는데서, 그 도시의 분위기에 녹아들어 있는 때문이 아닐까.
이에 비한다면,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신흥도시나 다름없다.
일찍이 푸슈킨도, 그의 시 속에서, 상트페테르부프크를 가리켜, '유럽쪽으로 낸 러시아의 창문'이라고 하질 않았던가.
그렇게 프랑크푸르트에 비한다면,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신흥도시답게 반짝반짝 윤이 나는 듯이 싱싱하고, 그
래서 푸슈킨의 집도 그 옛날의 현장감을 더 잘 드러내는 듯싶다.
그리고 톨스토이나 체호프, 도스토예프스키는 그 탄생이나 활동 연대 자체가 괴테보다도 훨씬 현대로 다가와 있어,
가깝게 싱싱하게 느껴질 것을 당연하다. 아령이며, 자전거며, 왕진가방이며, 이미 20세기에 들어선 풍물들인 것이다.
그러나 그때 황제의 고문관이었던 아버지와 프랑크푸르트의 시장의 딸이었던 어머니는 둔 괴테는, 명문 집안의 귀족답게,
세로로 현(絃)이 들어 있는 그 당시의 피아노며, 중국식 벽지를 쓴 응접실이며,
바로크식의 커다란 시계며, 거울 등이, 우리의 눈길을 끌긴 하지만,
통틀어서 모두가 고색 창연하게 느껴질 뿐, 싱싱한 현장감으로 다가오질 않는다.
프랑크푸르트라는 도시 자체가 중세 때부터 견본(見本)시장 도시로 자리를 굳혀왔고,
현재에도 1년에 15회 정도의 국제견본시장이 열리고 있어, 상업도시로서의 활기가 들끓고 있지만,
도시 전체가 풍겨주는 느낌은, 괴테 박물관이나 괴테 하우스에서 풍기는 느낌, 고색 창연한 늙은 느낌과 비슷하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프랑크푸르트는 유럽의 교통요충으로서 항공편이나 철도 중심으로 만만치 않은 역할을 하고 있고,
프랑크푸프트역의 그 고도의 서비스도 프랑크푸르트라는 도시가 풍겨주는 고풍스러움에 어울리게 자발머리 없지가 않고 매우매우 의젓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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