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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교육헌장-공포일(1968.12.05)

이종국 2011. 12. 5. 12:26

 

 

'국민교육헌장' 전문(全文)

 

우리는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조상의 빛난 얼을 오늘에 되살려,

안으로 자주독립의 자세를 확립하고,

밖으로 인류 공영에 이바지할 때다.

이에,

우리의 나아갈 바를 밝혀 교육의 지표로 삼는다.

 

성실한 마음과 튼튼한 몸으로,

학문과 기술을 배우고 익히며,

타고난 저마다의 소질을 개발하고,

우리의 처지를 약진의 발판으로 삼아,

창조의 힘과 개척의 정신을 기른다.

 

공익과 질서를 앞세우며 능률과 실질을 숭상하고,

경애와 신의에 뿌리박은 상부상조의 전통을 이어받아,

명랑하고 따뜻한 협동 정신을 북돋운다.

 

우리의 창의와 협력을 바탕으로 나라가 발전하며,

나라의 융성이 나의 발전의 근본임을 깨달아,

자유와 권리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를 다하며,

스스로 국가 건설에 참여하고 봉사하는 국민 정신을 드높인다.

 

반공 민주 정신에 투철한 애국 애족이 우리의 삶의 길이며,

자유 세계의 이상을 실현하는 기반이다.

 

길이 후손에 물려줄 영광된 통일 조국의 앞날을 내다보며,

신념과 긍지를 지닌 근면한 국민으로서,

민족의 슬기를 모아 줄기찬 노력으로,

새 역사를 창조하자.

 

1968. 12. 5

 

대통령 박정희

 

 

 

 

1968년 12월 5일 공포되었으며 철학자 박종홍(朴鍾鴻) 등이 기초위원으로 참여했다.

'반공'과 '민족 중흥'이라는 집권세력의 통치 이데올로기를 사회적 이상으로 삼고 그 실현을 국민교육의 지표로 삼은 까닭에 국민교육헌장은 선포 당시부터 정치적 논란을 빚었다.

국민교육헌장은 곧바로 한국교육의 이념과 동일시되어, 1960년대말~1990년초에 초·중등교육을 받은 한국인들은 통째로 헌장 내용을 외워야 했다.

 

'국민에 대한 국가의 우위'로 요약되는 이 헌장은 천황의 절대권력을 정당화하고 천황에 대한 무조건적인 복종과 충성을 강요하는 내용으로 구성된 일제의 '교육칙어'(敎育勅語)를 그대로 본뜬 것이라는 비판에 직면했는데, 이에 대한 공개적인 첫 비판은 유신체제하인 1975년 3월 1일 재야단체인 민주회복국민회의에 의해 제기되었다.

민주회복국민회의는 국민교육헌장에 맞서 "우리는 자유와 평화와 정의를 사랑하고, 압제와 불의를 거부하는 민주국민이다"로 시작하는 '민주국민헌장'을 발표했다.

 

국민교육헌장의 정치적 성격은 그 비판자들을 '반체제 행위자'로 엄단한 데서 역설적으로 잘 드러났다.

그 대표적인 예가 유신체제 말기인 1978년 6월 27일 송기숙·명노근·이홍길을 비롯한 전남대학교 교수 11명이 발표한 '우리의 교육지표' 사건이었다.

 

이는 "물질보다 사람을 존중하는 교육, 진실을 배우고 가르치는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기 위하여 교육의 참 현장인 학원이 인간화되고 민주화되어야 한다"면서 학원민주화와 제적된 학생들의 복교(復校), 민주교육을 질식시키는 국민교육헌장과 유신헌법의 철폐를 요구한 사건으로, 성내운·이효재 교수 등이 이 사건에 연루되어 해직·투옥되었다.

국민교육헌장은 선포된 지 25년 만인 1993년 초등학교 교과서와 정부 공식행사에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