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새마을 사례 수기)
사랑의 지게교장
강원도 춘성군 추곡국민학교 진병황 교장선생님
여기에 수록한 진병황 교장선생님의 사례는 1973년 [흙과 땀과 훈장]이라는 사례집에 수록된 내용으로, 본인은 공직자로서 당연히 할 일을 했다면서 기고하기를 극구 사양하여 같이 일하던 교감선생님이 정리하여 올린 것을 옮겼습니다.
(1) 벽지학교에의 운명
해마다 2월이면 교사들은 마음이 설레게 마련이다. 지난 한해를 마무리 짓는 학년도 말의 정리와 새 학년도를 맞을 채비에 분주한 탓도 있지만, 이맘때면 정례적인 교사의 이동발령이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발령 나지 않더라도 그 동안 정들었던 동료교사가 전근되고 그 후임에 새로운 동료를 외지에서 맞게 되므로 공연히 마음이 부산해지는 것이다.
1965년 2월.
나는 홍천군 관내의 청량국민교 교장으로 있었다. 이 학교에는 해방 이후 내가 처음으로 교장이 되어 창설했던 학교로서 두 번째 근무한지 3년째였었다. 옛정을 되살리면서 보다 더 훌륭한 학교로 키우기 위해 한창 중년의 정열을 쏟고 있던 참이었다. 전년에 큰놈이 춘천의 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된 것을 계기로 아내와 2남 2녀의 가족을 모두 춘천시 석사동으로 옮겼다. 집이라야 그때 돈 3만원을 주고 산 흙벽돌집이었으나 처음으로 마련한 내 집이었고, 우리 가정의 보금자리였다.
그러나 이때로부터 꼭 10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 보금자리에서 나는 가장 노릇을 해보지 못할 줄은 집을 살 당시에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가족들과 떨어진 홀아비 교장으로 자취생활을 그토록 오래 계속하리라고는 미처 앞날을 생각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가족들을 보내고 나니 처음 얼마동안은 허전하기도 했으나, 이내 학교일과 지역사회의 여러 가지 일에 마음 쓸 여가가 많아졌고, 나의 온힘을 외곬으로 쏟을 수 있었다. 그러던 중 64년 10월의 어느 날 교육감이 학교에 들르셨다. 학교의 이모저모를 살피고 극찬을 하시면서 신학년도에는 도시근교로 옮겨주겠다고 청하지도 않은 말씀을 하셨다. 행여 춘천 시내나 또는 새로 산 보금자리에서 출퇴근할 수 있는 춘천근교의 학교로 전임되려니 하는 기대를 갖게 되었다. 가족에게도 그런 가능성을 편지로 비치고 정례이동이 발표되는 2월 하순이 오기만을 학수고대했다.
2월 23일 강원도 교육위원회의 관하 초등학교 교장 및 교사의 이동발령이 발표되었다. 동료 교사들도 교장인 나의 새로운 전근처가 어디일까 하는 것이 큰 관심사인 듯 모두 숨을 죽이고 라디오 앞에 귀를 기울였다. ‘홍천 청량교장 진 병황 춘성 추곡교장’ 아나운서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춘성 군이라는 바람에 춘천시에서 가까우려니 하고 우선 기뻤다.
교원수첩을 꺼내어 새로운 임지를 찾아보니 춘성군 북산면 추곡 리에 소재한 2학급 편성의 분교장으로 이번에 초등학교로 승격하는 신설학교였다. 평교사로의 경력은 불과 4년 8개월뿐으로 비교적 빠른 출세였으나, 교장이 된 이래 신설학교의 초대교장만 이로써 7번째가 되는 것이다. 그것도 면소재지의 학교 교장조차 한번 못해보고 번번이 산간벽지의 조그마한 학교였다.
‘나는 벽지의 신설학교 초대교장이 숙명인가보다’하고 사주팔자를 탓하면서 실망도 했으나 거꾸로 새로운 용기가 솟아나기도 했다. ‘이런 팔자가 내 운명이라면 오히려 이 길에서 보람을 찾아야할 것이 아닌가.’하고 자위하면서 홀아비의 가벼운 이삿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새 임지인 추곡초등학교로 부임 차 찾아간 것은 그로부터 나흘 뒤인 2월 27일 아침이었다. 춘천에서 양구 행 버스를 타고 지금은 소양 댐으로 물 아래 잠길 국도를 소양강을 따라 동북으로 거슬러 오르기 1시간여 만에 추전리라는 곳에서 내렸다.
우연히 옛 친구를 만나 그의 안내로 추전리에서 6km나 떨어진 추곡학교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38도선 이북인 수복지구라는 것, 화전민들이 많이 사는 가난한 마을이라는 것, 그리고 호두 알보다 작은 가래가 많이 나는 골짜기라서 추곡이며, 속칭 가래 골이라고 한다는 것, 여름이면 파리와 모기가 없는 약수터에 휴양객이 많이 온다는 등의 간단한 마을 내력을 들었다.
한참 얘기를 들으며 걷는 길에 내가 부임하는 학구내의 이장을 만나 수인사를 건넸다. 이장의 표정과 인사말 속에서 무뚝뚝하고 쌀쌀하며 차가운 인상을 느꼈다. ‘뭐 이런 꼬마가 교장이라니……’하는 경멸과 실망의 표정을 그의 얼굴에서 읽을 수 있었다. 나의 체구가 작은 것으로 해서 초대면의 학부형을 실망시킨 일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1m 57cm의 짧은 신장과 부덕한 탓으로 아무렇게나 생겨먹은 얼굴이, 나의 경륜과 인품의 전부인 양, 남에게 이해될지라도 나로선 이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별로 신경을 써오지도 않았다. 학부형이 받은 실망을 두고두고 씻어주면 되려니 하고 내 스스로 채찍질만 하면 되는 것이다. 서로 무관해질 정도로 친숙해졌을 때 ‘진 교장은 키가 작으시네.’라고 놀리면 ‘어려서 하도 가난해서 억눌려 자랐기에 키 클 짬이 없었지요.’하고 대꾸하며 웃어넘긴다. 그때나 지금이나 내 주변엔 줄곧 가난한 이웃들뿐이었으므로 이런 농담을 가난을 벗기 위해 발분해야 한다는 궐기사처럼 둔갑을 하는 효험이 있었다.
(2) 천직을 삼은 신설학교 교장
이윽고 학교에 도착하여 보니 학부형은 고사하고 내가 먼저 실망할 지경이었다. 마을회관보다도 못한 18평의 목조가건물이 교사의 전부였으며, 운동장이라고는 부잣집 뜰만도 못했다. 두 칸으로 칸을 막아 1,2학년 80여명의 어린이를 최 춘영 부부교사가 가르쳐온 것이 지난 2년간의 추곡분교였다는 것이다. 교실에는 책상도 없고 걸상도 없는 훤한 마룻바닥뿐이었다. 최 교사 부부가 기거하는 숙소에 안내되어 가보니 오래 앉아 있지 못할 정도로 냉방이었다.
내가 당도한 날 마침 교실에서는 마을사람들 20여명이 모여 회의를 하고 있었다. 몇 달 전부터 이동농협 관계로 분규가 생겨 서로 헐뜯고 모함하며 매일같이 싸움질의 연속이었다는 것이다.
부임인사를 올리기에 안성맞춤이라 싶어 최 교사의 소개로 회의장에서 신임교장의 부임신고를 올렸으나 그때까지 열띠게 싸워온 회의분위기 탓인지 아니면 역시 나의 체구 탓인지 사람들의 반응은 지극히 냉담하고 쌀쌀하기만 했다. 도무지 이런 환경과 분위기 속에 교육한다는 열의가 나올 수 있을 것인가 나 자신 깊은 회의에 잠기지 않을 수 없었다.
나의 고향도 이곳 가래골과 다름없는 강원도 홍천의 산골이었고, 가난 때문에 초등학교만을 마치고 상급학교에의 진학을 하지 못했다. 가난과 무지 속에 백년을 하루처럼 되풀이 살아야 하는 농촌의 생리가 역겨워 견딜 수 없었던 소년시절을 농사일 틈틈이 독서로 위안을 삼았다.
나와 똑같은 환경의 이웃들에게 선조대대로 씌워진 굴레를 벗을 수 있도록 일깨워주고 가르쳐주는 것만이 삶의 보람이요 나의 사명이라고 자각하며 독학을 했다.
초등학교 3종 교원 검정고시를 치른 것이 1942년의 일이다. 요행히 합격이 되어 그 해 8월 22일 인제군 관대국민학교에 발령받은 것이 나의 교직생활의 첫 출발이었으며, 그때 나이 19세였다.
열과 성을 다해 먼 훗날을 그리며 묵묵히 일 해온지 4년 8개월 만에 평교사에서 교장으로 승진되어 47년 4월에 홍천군 청량국민교로 발령되었다. 해방 이후 교사 수는 모자랐고 학교는 늘고 해서 나처럼 24세의 애송이 교장이 나오게 된 것이다.
벽지의 신설학교였지만 내게 부여된 사명을 다하기 위해 알뜰살뜰히 학교를 가꾸고 교육에 집념하다 보니 언제 세월이 가는지 몰랐으며, 근무하던 학교가 정상궤도에 오르면 또다시 신설 초등학교의 교장으로 전임이 됐다.
지금의 추곡교 이전에 가장 오래 재임했던 학교가 삼생국민학교로서 7년을 근무했는데 부임 시에는 3학급이었으나 떠나올 때는 12학급으로 성장을 했고, 홍천군내에서도 가장 우수한 학교로 성장을 했다. 삼생교를 떠날 때 학부형과 제자들은 보잘것없었던 나의 공적을 길이 잊지 않겠다면서 공적 비를 교정에 세워주기도 했다.
그다음에 전임된 당무교는 내가 자원해서 가기를 원했던 학교였다. 삼생교는 이제 일류교가 됐으니 내가 없어도 잘돼 갈 것이라고 믿었고, 나의 젊음이 또 다른 벽지학교에서 개발의욕을 자극시켰던 것이다. 당시 당무교의 김 교장은 교육계의 대선배로서 연세가 많으셨고 가정형편도 딱하였다. 나는 교육장에게 그분과 자리를 맞바꿔주도록 건의했으나 나만이 뜻대로 당무교에 전임됐고, 김 교장은 삼생교가 아닌 다른 곳으로 전임되어 여간 가슴 아프지 않았다.
당무국민학교는 내가 부임했을 때 재적학생이 40여명뿐으로 초가지붕의 교사는 창만 뚫려 있을 뿐 바람만 세게 불면 교과서와 노트가 흩날리곤 했다. 책상과 걸상도 없고 사무실에조차 집기라곤 하나도 없는 마치 옛날서당과 같은 학교였다.
마을이 가난하고 보니 학부형들의 교육열도 높을 수가 없었다.
나는 학교의 기틀을 잡는 데 전력을 다하는 한편 무지하고 가난한 마을 사람들이 타성에만 젖은 나태한 생활을 청산하도록 일깨우는 데 힘을 썼다. 대추나무 5백 그루를 학교주변에 심어 본보기를 보이는 한편, 내가 먼저 지게를 지고 삽을 들며 환경정비에 앞장을 섰다.
불과 4년 동안의 짧은 재임기간이었지만 학교의 면모는 일신됐고, 주민들의 인식도 달라져 근면․자조․협동하는 생활풍토가 조성되었다.
최근에 소식을 들으니 새마을 중에서도 가장 우수한 자립마을로 성장하였다니 10여 년 전에 뿌린 씨앗의 열매를 보는 듯해서 교육의 기쁨을 절감하게 되는 것이다.
62년에 초임 교장시절을 보냈던 청량교에 다시 되돌아가 비교적 편안한 생활을 보냈으나 벽지의 신설교가 제격이었는지 오래 있지를 못하고 추곡교로 발령된 것이다. 삼생교나 당무교에서 겪었던 창설의 힘겨움을 다시금 되풀이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내게 주어진 운명이고 천직이라고 느꼈다.
(3) 가래골 정화
추곡리는 춘성군의 최북단으로 군청이 있는 춘천시에서 북쪽으로 44km 떨어져 있다. 소양강의 담수로 새로 난 국도가 1백 굽이가 넘는 산길을 굽이굽이 돌아 두 개의 큰 산을 넘고 나면 1백80호에 8백70명의 화전민이 태반인 이 마을에 이른다. 22km나 떨어져있던 면소재지는 물 아래 잠기고 면사무소는 추전리로 옮겼으며 경찰지서와 우체국은 추곡리로 이전하여 추곡국민교의 확충과 더불어 새마을로 변모한 것이다. 기관이 이 마을로 옮긴 것은 바로 국도변이며 1백 년 전부터 유명하게 된 추곡약수터가 아랫마을 골짜기에 있어 내객의 출입이 잦은 때문이다.
학교는 해발 811m의 종류산 기슭에 자리 잡고 있으며 앞에는 사명산, 옆으로는 죽엽산이 병풍처럼 둘러친 사이로 소양강의 한 가닥 맑은 물이 발아래 보인다. 올해 등고선 170m까지 물이 찼으나 약 200m까지는 내년 안으로 담수될 것이어서 아랫마을 30여 호는 언젠가 떠나지 않으면 안 될 처지에 놓여 있다.
등고선 230m에 자리한 추곡초등교는 소양호가 만수가 되면 바로 호숫가의 학교가 될 것이다.
험준한 산 속의 수복지구인 추곡리는 산지를 이용한 화전민의 마을이었기 때문에 어느 집이나 살림이 어렵긴 매한가지였으며 가난을 숙명처럼 여기면서 의욕 없는 생활을 영위해 왔었다. 더구나 사법행정기관과 멀리 떨어져 있었던 탓으로 도박, 마약, 음주, 싸움 등 온갖 사회악은 작은 마을의 힘에 넘치도록 고질화되어 있어 주민 서로 간에는 중상과 모략, 반목과 질시만이 오고갈 뿐이었다.
학교에 어린이를 보내는 것도 교육열에서라기보다 벽지학교이기에 무상으로 주는 급식의 혜택을 받자는 뜻이 더 컸을지도 모른다.
첫 직원회의 때 최 교사 부부로부터 이곳 지역사회의 여건을 무려 3시간 동안이나 브리핑을 받고 나니 앞으로 해나갈 일이 엄청나다는 생각뿐이었다.
우선 초등학교로의 승격과 더불어 1, 2, 3학년 140명 어린이를 3학급으로 편성하고 셋이서 수업을 시작하는 한편 6km나 떨어진 추전국민학교에 통학하고 있는 4,5,6학년생 130여명을 취학시킬 방법을 강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학교 기성회장으로 있는 학부형을 찾아가 학교운영방안을 협의했으나 뾰족한 묘수는 나오지 않았다.
초등학교로 승격된 데다가, 새로 교장이 오고, 먼 곳 학교에 다니는 상급학년 어린이들도 수용해서 함께 가르치겠다는데. 학부형들이나 마을 사람들의 반응은 ‘네 멋대로 해보려무나.’하는 투로 냉담하고 무관심한 것이었다.
실상 그들로서는 엄두도 낼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오랫동안 내려온 가난과 나쁜 인습, 그리고 남에게만 의지하려는 무기력에다가, 덧붙인다면 키가 작은 교장이 어떻게 학교를 운영할 것인지 두고 보자는 방관적 심사도 없지 않았던 것 같았다
만일 내가 그들과 함께 술도 마시고 노름도 하였더라면 학교에 대한 협조문제는 좀 더 빨리 해결할 수 있었겠지만 그것은 한낱 미봉책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고, 근본적인 해결방안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숙직실에서 혼자 골몰히 생각한 끝에 이 고장의 교육은 이런 악조건을 극복하여 마을전체가 보다 잘살 수 있도록 열성 있는 계몽사업과 영농기술의 지도가 선결문제라고 결단을 내렸다.
그리하여 첫째로 상습적인 도박을 없애야 하겠고, 둘째로 마약중독자를 없애고 코데인을 들여오는 악덕상인을 막아야 하겠으며, 셋째 부락주민들의 파벌로 인해 흩어진 주민들의 간격을 없애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나의 결심을 이튿날 아침 최 교사 부부에게 말하고 그들의 동의를 얻었다. 셋이서 힘과 마음을 합쳐 불타는 정열로 지역사회를 개조 개혁하는 데 헌신적인 노력을 기울이자고 다짐했다.
먼저 학교교육의 목표를 6개항으로 정했다.
1. 굳은 의지와 신념으로 자기생활을 스스로 개척하는 사람을 기르자.
2. 스스로 공부하는 사람을 기르자.
3. 일상생활을 과학적으로 탐구 처리하는 사람을 기르자.
4. 좋은 위생습관과 체력단련으로 늠름하고 건강한 사람을 기르자
5. 몸가짐이 단정하고 예의 바른 고상한 인품을 지닌 사람을 기르자
6. 근면 검소한 생활로 자조 자립 협동하는 사람을 기르자
이상 여섯 가지를 교육목표로 정하고 또한 교화(校花)를 칸나로 정했다. 줄기차게 뻗어가는 노력을 상징한 것이다. 또한 교실 벽에는 ‘근로는 생활의 꽃이다’라고 크게 써 붙였다. 이 말은 내가 평소 주장해온 나의 교육에 관한 근본철학이며, 생활철학의 전부를 뜻하는 것이었고 신념이었다.
우선 이러한 교장의 철학과 신념을 주민들과 학생들에게 널리 알려야 하겠기에 구호처럼 부르기 쉽게 만들어 학교의 요소마다 그리고 각 가정에 유인물로 배포하여 세 사람의 교직원이 가정방문을 하여 해설과 계몽작업을 폈다.
구호는 다음의 네 가지였다.
첫째, 근로는 생활의 꽃이다. 몸소 일해 실천하자
둘째, 우리의 문제는 우리의 능력으로 해결하자.
셋째, 내 집은 내 힘으로 우리 고장은 우리 힘으로 새롭게 건설하자.
넷째, 내 조국을 위해 즐겁게 봉사하자.
(4) 일면 교육, 일면 투쟁
교장인 나와 최 씨 부부교사 등 세 사람은 낮에는 2개 학년씩을 한 교실에서 복식수업을 하고, 밤에는 가정방문을 통한 주민계도와 뜻있는 청년들을 모아 상록수교육을 시키는 나날이 계속되었다.
그 동안 4,5,6 학년을 수용하기 위해 관계당국과 절충을 벌여 3월 20일자로 130여명의 상급학년 학생들을 추전국민학교로부터 인수받았다. 임시로 놀고 있는 동네 방앗간을 빌어 가교사(假校舍)로 썼으며, 두 칸짜리 가교사도 창호지를 바르는 등 약간의 손질을 하여 65학년도의 첫 출발을 시작했다. 여하튼 3개 교실에 6개 학년, 270여 명의 학생, 3명의 교직원으로 추곡초등학교가 출범 한 것이다.
그러나 산골짜기의 춘궁기는 이르고 또한 심각한 것이었다. 그때만 해도 소양강댐을 막기 전이어서 마을은 220 가구에 인구 1,065명이었다. 이런 많은 인구가 오로지 논 17ha, 밭 87ha에 의지해서 살아야 했으니 가구당 경지면적은 0.5ha도 안 되는 것이었다. 식량난이 극심하여 장리쌀을 얻어먹지 않은 집이 없었다. 그런데도 모두 자포자기를 했음인지 도박과 마약으로 나날을 보내는 것이었다.
나의 설득에 동조한 마을의 모범청년들과 함께 밤이면 마을을 돌면서 도박단을 적발했고, 동네 입구 도로를 막고 잠복했다가 코데인을 팔러오는 상인들을 잡았다. 압수한 코데인이 큰 사과궤짝 하나만큼 쌓였다. 지서주임인 서 경사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성과는 조금씩 나타나기 시작했으나 한편으로는 학교장에 대한 반항과 불만이 또한 작지 않았다.
몰래 숨어서 코데인 주사를 맞다가 목숨마저 잃는 사람이 몇 사람 있었다. 이런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마약중독자를 잡아가두고 때로는 때리기도 하며 꾸짖기도 했다. 혹은 도박하는 집 문짝을 떼어다 학교 사무실에 갖다놓기도 하니까 할 수 없이 학교에 와서 빌고 다시는 도박을 하지 않겠다는 각서와 맞바꾸어 문짝을 찾아가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오랜 인습에 젖어온 폐풍이 하루아침에 근절될 수는 없었다. 교육적인 방법으로 옳고 그르냐는 시비가 있을 수 있겠지만, 나는 조회시간에 어린이들에게 호소함으로써 간접적인 치유방법을 써 보았다.
“우리가 가난에서 벗어나려면 우선 우리 마을에서 성행하고 있는 노름과 마약이 없어져야 한다. 너희들 부형 중에 이런 분이 계시거든 매달려 애원하고 설득시켜 보라. 그래도 반응이 없거든 온 집안이 모두 모인 가운데 아버지 앞에 식칼을 놓고 ‘이 칼로 우리 식구들을 모두 죽이고 아버지 마음대로 하십시오.’라고 대들어 보라”고 아이들에게 시켰다.
몇 아이가 그대로 실천했었던 듯 그 반응은 곧 학교로 되돌아왔다. 어떤 이는 어린 자식의 권유에 크게 감동되어 다시는 안 하기로 맹세했다고 나를 찾아와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아버지가 있었는가 하면, 어떤 학부형은 교장으로서 그처럼 가혹한 교육방법을 쓸 수 있느냐고 따지며 항의하는 이도 있었다.
때로는 주민들이 교장은 학교교육이나 전념할 일이지 왜 동네 참견 다하고 귀찮게 구느냐고 비난하는 여론이 있다는 얘기도 들려왔다. 그러나 이런 비난의 소리나 항의에 조금도 굴하지 않고 이미 정한 생활구호 실천과 지역사회의 정화라는 단계적 사업 목표를 추진하는 데만 골몰했다.
마을 안의 파벌다툼도 농협의 이동조합에 얽힌 감투싸움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당시 이 마을의 조합장인 김 씨를 불러 파벌해소책을 상의했다.
설득도 하고 달래도 보았으나 자기 고집만 부리기에 따귀를 치며 따끔히 훈계를 했다. 그 후로 자주 대립되는 파벌의 상대자를 한 자리에 불러 서로 오해나 모략에 의해 빚어진 감정을 해소할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해 줌으로써 차츰 감투싸움이나 파벌의식은 사라져 갔다.
몇 달 동안 이런 일이 되풀이되자 마을 주민들은 어느 정도 교장이 하는 일에 호응하고 차츰 교육에 대한 관심을 갖고 학교에 찾아들기 시작했다. 첫 단계 사업인 지역사회의 정화에 보람을 느끼게 되자, 다음은 근로의식의 고취와 협동단결심을 배양하며 아울러 학교를 훌륭히 키우는 문제가 시급했다. 우선 교실이 부족한 데서 오는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마음대로 뛰고 놀며 전교생이 조회를 할 수 있는 운동장도 절실히 필요했다.
(5) 횃불운동장
개교 당시 학교부지는 자체부담으로 해결할 것이 개교조건이었으나, 기부 체납된 1천여 평의 땅은 학교 위치로 적당하지 못했다. 가교사 바로 위의 15도쯤 경사진 돌무더기 밭이 알맞으나 새로 살 형편은 못되고 싼값의 임대료를 해마다 물기로 하고 학교 자체에서 부지개척에 나서게 됐다.
학부형들은 그런 험한 곳에 학교를 세울 수 없으니 다른 곳을 찾아보라고도 하고, ‘그 땅에 학교가 서면 내 성을 갈겠다.’고 장담하는 노인네도 있었다. 이때부터 피나는 노력이 시작됐다. 마을 사람들을 움직이려면 내가 먼저 수범을 보여야 했다. 남보다 내가 잠을 덜 자고 일찍 일어나서 괭이와 삽을 잡고 지게를 지며 일을 하는 실천을 통해 근로의식을 고취한다는 생각이었다. 목표는 운동장을 만드는 것이다.
3m 이상의 낭떠러지에 돌과 흙을 지게로 지고 날라다 메우고 석축을 쌓아 운동장을 넓히기 시작했다. 낮에는 수업을 하고 방과 후에는 어린이들과 돌을 날마다 메우고 쌓으며 밤에도 최 교사와 같이 횃불을 밝히면서 작업을 계속했다. 날씨 때문에 일을 할 수 없는 밤에는 각 가정을 찾아다니며 영농기술 지도와 부업을 권장하곤 했다.
농한기에는 사랑방마다 모여 앉아 화투치기로 소일하는 마을 사람들에게 가마니 짜기, 새끼 꼬기, 잠구 만들기 등을 권장 지도하였다. 언제나 작업복 차림으로 잠시도 쉬지 않고 움직이는 교장에 대해서 처음엔 비웃어오던 마을 사람들도 차차 인식이 달라지는 듯했다.
바지런한 것은 내 체구와 마찬가지로 나의 천부적인 습성이며 때로는 일에 지쳐 일어날 수 없는 아픔을 참으면서도 매일매일의 일하는 일과에는 변동이 있을 수 없었다.
끈질긴 설득과 땀 흘려 일한 노력의 결과는 헛되지 않아 주민들의 마음을 하나하나 감동시키기에 이르렀다. 주민들이 하나둘씩 학교일에 협조하게 된 것이다. 농사일로 피곤해진 몸을 이끌고 밤이면 우리 교사와 같이 귀여운 자녀들의 운동장을 닦는 데 참여한 것이다. 학생들도 구슬땀을 흘리며 고사리 같은 손으로 밤늦게까지 돌 줍기에 힘을 모았다.
학교와 학부형 그리고 학생들이 삼위일체로 하는 협동 작업은 무서운 단결력을 과시하게 했고 마침내 65년 12월에 어린이들의 숙원이던 학교부지와 운동장은 이루어진 것이다. 1,800여 평의 학교부지와 운동장은 이 마을이 생긴 이래 처음의 협동 작업으로 이루어진 것이며, 훤칠하게 넓은 마당을 가져보기도 처음이었으니 온 동리의 기쁨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밤마다 횃불을 밝혀 이루어진 운동장이라고 해서 ‘횃불운동장’이라고 명명되었다.
이렇게 학교부지가 개척된 다음에는 교실을 새로 짓는 일이 남았다. 교실 부족으로 노천수업을 할 때가 많았으며, 나무그늘에서 수업을 하다가 비를 맞고 중단해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교육청에도 이런 실정을 여러 차례 호소하고 건의했으나 신통한 해결방안은 없었다. 방앗간을 빌려 쓰던 설움을 어떻게든지 이겨내기 위해 27평짜리 가교사를 짓기로 하고 내 손으로 설계를 해서 무조건 공사에 착수했다. 목재 값은 내 봉급에서 매달 월부로 갚기로 하고, 깊은 산 속에서 등짐으로 나무를 져 날랐으며 톱과 대패가 내 손에 쥐어져 목수일이 시작되었다.
(6) 종루산 울린 만세의 함성
보람을 찾기까지는 반드시 피나는 노력과 시련이 앞선다는 신념과, 자라나는 새싹들을 잘 가꾸고 보호해야 한다는 교육자로서의 사명감이 불철주야 교실 짓기에 미친 듯 몰아댄 것이었다. 장차 정규교실을 짓게 되면 가교사는 다목적 부속 건물로 이용될 것을 염두에 두었었는데, 예상대로 지금은 발전실, 운동구실, 잠실, 숙직실 등 다목적으로 쓰이고 있는 것이다.
준공 직후에는 홍수로 집 잃은 사람들의 임시숙소로 쓰이기도 해서 마을 사람들은 ‘진 교장은 선견지명이 있어’‘종루산 산신령이야’하는 소리가 지금까지도 ‘산신령’이란 별호를 갖게 된 유래가 되었다.
교실난과 운동장이 해결되어 어린이들이 마음 놓고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이 되자 학부형들도 점차 학교일에 협조하게 되고, 게으름보다는 부지런하게 꾸준히 노력만 하면 무엇이든 못할 것이 없다는 자신감이 심어지는 듯했다.
홍수로 인한 아픔도 가실 때쯤 해서 제1회 체육대회를 새 운동장에서 열었다. 실의에 차 있는 주민들에게 희망과 활기를 불어넣고 온 마을이 우애롭게 지내며 단결하자는 뜻에서 ‘새마을체육대회’라 이름 짓고 간단한 상품도 마련하였으며, 어린이들과 같이 어른들도 함께 뛸 수 있는 경기를 많이 넣었다.
이 날만은 추곡리 마을이 떠나갈 듯한 잔칫날이 되었으며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마을사람 모두가 횃불 운동장에 모였다. 술 취한 사람도 없었고 폐회식 때까지 한 사람도 흩어지지 않고 ‘추곡국민학교의 무궁한 발전만세’를 소리 높여 외쳤다. 만세소리는 종루산에 메아리쳐 산울림으로 번지면서 그 여운이 오래 오래 내 귓전에 남는 것이었다.
이제 나는 교육자로서의 보람에 한껏 젖을 수 있었다. 그러나 교육자의 욕심에는 끝이 없는 것이다. 이왕이면 이 학교의 첫 졸업생만은 정규교실에서 졸업식을 갖고 싶었다. 군 교육청에 여러 차례 부탁하여 겨우 얻어낸 예산이 15만원뿐이었으니 이 돈만으로는 정규교실을 한 칸도 짓기 어려운 실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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