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사람은 너무 선이 가늘어. 너무 신경질적이야. 섬사람들이니까.
우린 달라. 대륙이야 대륙….”
최근 한국의 근대건축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재조명되는 건축가가 있다.
일제 강점기인 1930년대 다른 건축가와 달리 서구 모더니즘 양식으로 왕성하게 작업을 이어간 박길룡(1989~1943)이다.
박길룡은 당시 유일하게 건축을 공부할 수 있었던 경성공업전문학교 건축과를 한국인으로는 이기인과 함께 처음으로 졸업했다.
당시 건축가 졸업 동기는 일본인 3명과 한국인 이기인 등 총 다섯 명이었다.
졸업 이듬해인 1920년 조선총독부 건축기수로 들어가 건축 작업을 시작했다.
12년여간 총독부에서 근무한 뒤 자신의 사무실을 차린 것은 1932년. 당시 민간 건축설계사무소는 대부분 일본 건축가에 의해 운영됐던 것을 감안하면 박길룡의 개소(開所)는 이례적이었다.
이때부터 11년간 박길룡은 현재 간송 미술관으로 쓰이는 보화각, 지금은 철거된 화신 백화점을 설계했다.
이밖에 조선생명보험 사옥, 경성제국대학 본관, 이문당 사옥, 동일은행 남대문 지점, 한청빌딩, 경성여자상업학교 교사·강당, 혜화전문학교 본관 등도 박길룡의 작업이다.
특히 그가 설계한 화신백화점은 서울에서 방문하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현재 종로타워가 들어선 종각역 사거리에 있던 이 백화점은 1988년 재개발 사업에 의해 철거됐다.
박길룡은 건축 설계 외에도 신문 등에 건축 관련 기고를 한 것뿐만 아니라 첫 건축 잡지인 ‘조선 건축’을 창간하기도 했다.
작고(作故) 2년 전이다. 1941년 낸 조선주택잡감(朝鮮住宅雜感)에서 박길룡은 “조선미(朝鮮美)라든가 이른바 조선적인 데를 보존하고 싶다는 기분이 답보의 근원이다”라며 “기존 관점에 구애됨이 없이 생활 자체에서 짜내는 새로운 방향에서 재발족해야 한다”고 자신의 건축관을 밝히기도 했다.
한국 근대건축의 최고 권위자로 통하는 김정동 목원대 교수는 “박길룡이 우리 근대건축사에 남긴 업적은 말 그대로 선구적”이라며 “우리 건축이 나름대로 자발적 건축 활동을 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었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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