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게천이 복개되자 도로의 너비가 50m로 넓어졌다.
1960년대까지 서울에서 가장 폭넓은도로였다.
김현옥 서울시장은 부임 이듬해인 67년 봄 문득 "미아리고개~청계천~ 신촌.홍제를 잇는 유료 고가로로를 건설하면 서울시내 차량 소통이 훨씬 원활해지지않을까"하고 생각했다.
김시장은 건축가 김수근씨에게 자신의 구상을 설명하고 설계스케치를 부탁했다.
때마침 일본 도쿄(東京)에 64년 올림픽을 대비한 고가도로를 건설되 편리성을 인정받고 있었다.
일본에서 공부한 김수근씨는 도쿄 고가도로 설계등을 참고해 만든 고가도로 조감도를 김시장에게 보였다.
김시장은 67년 8월 8일 "유료 고가도로 건설계획"을 발표했다.
청계천을 거쳐 동북쪽으로는 미아리, 서쪽으로는 서대문~ 홍제동,서대문~심촌, 서대문~의주로~삼각지를 연결하는 유료 고가도로를 69년 까지 완공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그시절 학자들은 이계획을보고 '영뚱하지만 기발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한면 67년말 현재 서울시에서등록된 차량은 2만5천6백80대였으며 이중 자가용은 4천 75대에 그쳐 굳이 고가도롤를 건설하지 않아도 차량소통에는 지장이 없어기 때문이다.
계획이 발표 되자 전문가들과 언론이 반대하고 나섰다.
주로 외곽지역 교통을 원할하게 하기 위해 만드는 고가도로를 도심에 건설하는것은 부적절하며, 오희려 지하철 건설이 바람직하다고 지적했다.
이에 따라 유료 고가도롤 건설계획은 크게 후퇴 되었다.
무교동~신문로~서대문 로터리를 거쳐 신촌과 홍제동에 이를는 당초 계획과는 달리 신촌은 커녕 서대문 로터리까지도 못가고 광교에서 공사가 끝났다.
이같이 계획이 크게 축소됐지만 김시장이 절대 양보할수 없는곳이 있었다.
광교에서 거쳐 용두동에 이르는 구간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주로 청계고가도로를 이용해 워커힐을 자주 찾았다.
청계고가 도로 건설공사는 70년 양택식 시장 부임후에도 계속되었다.
1호 터널이 뚫인 남산과 연결되고,청계천 7가에서 마장교 까지 연장되었다.
박 대통령의 워커힐 나들이가 훨씬 편리해졌다.
청게고가도로가 지난 2003년 7월 철거 직전의 모습을 갖춘때는 71년 8월 15일이었다.
본선길이가 5.86km에 25개 램프의 길이가 2.58km에 달했다.
청계고가도로는 교각이 세워질때부터 투박한 인상을 주었다.
이는 '젖은 비용으로 많은 양을 짓는다'는 김시장의 건설 철학에따라 비싼 수입철근.철판은 적게 쓰는대신에 값싼 시멘트를 많이 쓰는 가장 큰 원인이다.
개통후 이용 차량의 급증으로 뻔질나게 벌어지는 '땜질식 보수' 도 한몫했다.
복개도로를 들어내고 복원한 인공 청계천에 잠자리나 개똥벌레가 찾아오는지 두고봐야 할것이다.
청계천에 너비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양족에 10m씩 도로를 내고 나면 청계천에 너비는 30m를 못넘는다.
청계천 양쪽으로 재개잘 고층 건물들이 들어서면은 탁 트인 시원한 공간을 확보하기 도 어려운것이다...
그러니 지금 재개발 업자들과 결탁하여 논란이 일고 있지않은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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