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로마로 가는길...!!!-----이탈리아
이탈리아는 마치 긴 장화 모양으로 생긴 반도(半島)국으로 지중해 중앙부에 위치하고 있다.
이러한 지형으로 인해 북서에서 남동까지의 길이가 약 1,200 ㎞에 이른다.
지도상으로 보면 최북단은 북위 47°5'30"이며 단은 북위 35°29'24"의 위치에 있다.
북쪽은 알프스를 경계로 프랑스와 스위스, 오스트리아의 3개국과 접하고 있으며 토리에스테 항을 경계로 슬로베니아와 가까이 한다.
총연장 8,600 ㎞의 해안선은...
동쪽으로는 아드리아 해(海), 서쪽으로는 리구리아 해(海)와 티레니아 해(海), 남쪽으로는 이오니아 해(海)에 둘러싸여져 있다.
이탈리아 반도는 이베리아, 발칸 반도와 함께 남유럽의 3대 반도에 포함되지만...
다른 반도와는 달리 동, 서 지중해 사이에 위치해 있어 가장 유럽적인 자연과 문화를 지닌 곳이다.
이탈리아의 국토는 지형적인 면에서 북부쪽의 대륙부, 평야부, 반도부, 도서(島嶼)부로 나눌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대륙부는 알프스산맥쪽, 평야부는 포 평원, 반도부는 중남부 지대,
도서부는 시칠리아 섬과 사르데냐 섬, 엘바 섬, 스트론보리 섬을 포함한 70여개의 섬이다.
이탈리아의 국토는 지형적인 면에서 북부쪽의 대륙부, 평야부, 반도부, 도서(島嶼)부로 나눌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대륙부는 알프스산맥쪽, 평야부는 포 평원, 반도부는 중남부 지대,
도서부는 시칠리아 섬과 사르데냐 섬, 엘바 섬, 스트론보리 섬을 포함한 70여개의 섬이다.
총 면적은 30만 1,278 ㎢이며 국토의 83%가 대륙과 반도, 17%가 섬으로 되어 있다.
전국토의 80% 정도는 농지와 산림지역으로 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물이 부족해 농업에는 적합하지 않고 산림지역도 목재로서의 가치가 없는 잡목이 많다.
이탈리아는 산지와 구릉이 많은 나라로 700 m 이상의 산지가 35% 정도를 차지하고 있으며 국토의 42%는 구릉지대, 나머지 23%는 평지로 구성되어 있다.
전국토의 1/5에 불과한 평야 가운데 가장 큰 곳은 포 평원으로
넓이가 55,000 ㎢에 이르며 그밖에 1,900 ㎢의 캄파니아 평야를 비롯한 소규모의 평야가 흩어져 있다.
서쪽이 높고 동쪽이 낮은 포 평원은 동서 길이가 약 400 ㎞, 남북 너비가 100∼200 ㎞나 되며 세 방향이 알프스와 아펜니노 산맥에 접해 있고 동쪽은 아드리아 海와 마주 본다.
콜로세움(Colosseum):고대 로마의 원형 경기장
콜로세움(Colosseum)은 고대 로마 시대의 건축물 가운데 하나로 로마 제국 시대에 만들어진 원형 경기장이다.
현재는 로마를 대표하는 유명한 관광지로 탈바꿈하였다.
콜로세움이라는 이름은 근처에 있었던 네로 황제의 거상(巨像:colossus)에서 유래한다.
콜로세움의 역사
콜로세움은 네로 황제의 황금 궁전(도무스 아우레아)의 정원에 있던 인공 호수 자리에 세워진 것이다.
공사는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에 의해 72년에 착공되어 8년 동안의 기적적인 역사를 거쳐 티투스 황제 때인 80년에 준공되었다.
콜로세움은 높이 48m, 둘레 500m 등 경기장 내부의 길이 87m와 폭 55m라는,
당시에 건립된 건축물 가운데 최대의 건축물이었다.
티투스는 등극하기 전인 70년에 이스라엘 왕국과의 전쟁에서 대승을 거두고 10만 명의 포로를 데리고 귀환하였다.
그 중 4만 명을 동원하여 콜로세움을 건축했다는 전설이 있다.
콜로세움은 검투사들끼리의 싸움이나 맹수들과의 싸움을
시민들에게 구경시킴으로써 한편으로는 일체감과 애국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공포심을 심어주기 위한 정치적인 목적으로 건립되었다.
콜로세움은 608년까지는 경기장으로 사용되었지만
중세기에는 군사적 요새로 이용되다가 그 이후에는 성당이나 궁전 등의 건축에 사용될 자제의 제공 터가 되었다.
콜로세움의 구조
이 거대한 원형극장은 4층으로 되어 있었다.
1층은 높이 10.5m의 도리아식 반원주, 2층은 높이 11.85m의 이오니아식 기둥, 3층은 11.6m의 코린트식 기둥으로 되어 있다...
4층은 관중들이 작열하는 햇빛을 피할 수 있게 벨라리움이라는 천막을 고정시키기 위한 장대장치를 지탱하는 벽으로 되어 있다.
이외에도 계단과 독립 공간, 즉 갈레리아가 있었다.
이 갈레리아는 이집트산 콩, 음료수 등을 파는 상인들의 휴식공간으로 많은 시민들이 여기서 조우했다.
경기장 바닥은 모래로 덮이고, 곳곳에는 사냥장의 분위기를 살려 나무와 구릉을 설치하였다.
바닥 밑에는 노예들과 맹수들을 수용하던 각종 우리 시설이 갖추어져 있었다.
처음에는 바다에서의 싸움 장면도 연출하였다고 한다. 그
러나 바닥 전체에 물을 가두는 일이 용이하지 않아 별도의 공간을 따로 마련하였다.
그러나 이 건물의 설계자가 누구인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도미티아누스의 건축가 라비리우스라고 하기도 하고, 가운덴키우스라는 사람이라고도 하는데, 단지 추측일 뿐이다.
스페인광장(Piazza di Spagna)
포폴로 광장은 스페인 광장(Piazza di Spagna)과 연결된다.
이 광장의 이름은 스페인 대사관이 있는 스페인 궁에서 유래된다.
이 광장 주변에는 베를리오즈, 드뷔시 등 로마 대상을 받은 프랑스의 젊은 예술가들이 머물던 빌라 메디치가
소나무 숲을 뒤로하고 로마를 내려다보고 있으며, 영국의 시은 키츠와 셸리가 살았던 건물이 있고
로마의 최고급 패션 거리인 비아 데이 콘돗티가 테베레 강 쪽으로 펼쳐져 있다.
이 거리에는 한때 로마를 찾았던 괴테, 멘델스존, 리스트 등
유럽 최고의 문인들과 음악가들이 즐겨 찾던 ‘카페 그레코’가 아직도 그 전통을 유지하고 있다.
이 스페인 광장이 유명해진 것은 광장과 언덕 위의
삼위일체 성당을 연결하는 1720년대에 설계된 우아한 바로크 양식의 돌계단 때문이다.
이 계단은 낮은 곳과 높은 곳을 연결한다는 단순한 기능을 넘어서, 사람들을 이끄는 묘한 마력과 매력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누구나 이 계단 앞에 서면 괜히 한번 걸어 올라가 보거나 앉아보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된다.
또 이 계단의 흐름을 자세히 관찰해 보면 마치 바로크시대의 우아한 춤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산피에트로 대성당 종탑에서 내려다본 산피에트로 광장
바티칸 시국(vatican)
이탈리아의 수도인 로마 안에는 바티칸이라는 또 하나의 국가가 있다.
세상에서 가장 작은 독립국으로 잘 알려져 있는 이 곳은 전세계 카톨릭의 총본산이라는 성스러운 의미 외에도
미켈란젤로의 불굴의 명작인 "천지창조"와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 등
책에서만 볼 수 있었던 훌륭한 예술작품들을 직접 감상할 수 있는 이탈리아 미술의 보고이기도 하다.
바티칸 시티는 이탈리아 로마 시내 테베강 서안에 자리잡고 있다.
한번에 30만명을 수용할 수 있는 성 베드로 광장 앞에는
흰색 선이 도로 위에 그어져 있는데 이것이 바로 이탈리아와 바티칸을 구분짓는 국경이다.
바티칸은 이탈리아가 19세기 들어 근대통일국가로 탈바꿈하면서 교황청 직속 교황령으로서의 지위를 상실하게 되었다.
이후 1929년 이탈리아와 교황청 주변의 지역에 대해
주권을 인정하는 라테라노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영토 0.44㎢의 세계에서 가장 조그만 독립국이 되었다.
현재 바티칸의 영토권은 성베드로 대성당과 로마에 있는 성당과 궁전을 포함한 13개 건물이있다.
로마 동남쪽 120km지점에 있는 카스텔 간돌포(Castel Gandolfo)의 교황 하계 관저에 국한된다.
영토 내에는 성 베드로 광장, 대성당, 교황궁전, 관청, 미술관, 도서관, 은행, 방송국, 인쇄국, 철도역, 우체국, 시장 등이 있다.
바티칸 미술관(Vatican Museum)
바티칸의 산 피에트르 대성당에 인접한 교황궁 내에 있는 미술관이다.
역대 로마 교황이 수집한 방대한 미술품·고문서·자료를 수장(收藏)하고,
또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등의 대화가에 의한 내부의 벽화·장식으로 유명하다.
창설은 율리우스 2세(재위 1503∼1513) 때
벨베데레의 정원에 고대 조각이 전시된 것으로 시작되었지만, 일반에게 공개된 것은 클레멘스 14세 치하인 1773년이다.
현재 본관은 피오 클레멘티노미술관·도서관·성(聖)유물관·회화관 등 많은 부분으로 나뉘고있다.
또 각실은 보르지아실(室)·라파엘로실·지도실이라는 특유의 명칭으로 불린다.
미켈란젤로나 안젤리코의 벽화로 유명한 시스티나성당·파오리나성당·니코로 5세 성당 등도 미술관의 일부로 여기는 것이 보통이다.
산피에트로 광장(Piazza San Pietro)
산피에트로 광장 이라고도 한다.
이탈리아 바로크양식의 거장인 화가·조각가 베르니니(Giovanni Lorenzo Bernini)가 1656년 설계해, 12년 만인 1667년 완공하였다.
입구에서 좌우로 안정된 타원꼴이며, 가운데서 반원씩 갈라져 대칭을 이룬다.
좌우 너비는 240m이다. 정면 끝은 산피에트로대성당(성베드로대성당)의 입구에 해당한다.
반원형인 광장 좌우에는 4열의 그리스 건축양식인 도리스양식 원주 284개와 각주 88개가 회랑 위의 테라스를 떠받치고 있다.
테라스 위에는 140명의 대리석 성인상이 조각되어 있다.
회랑은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를 향해 팔을 벌리고 있는 모습을 형상화하였다.
광장 중앙에는 로마의 3대 황제 칼리굴라(Caligula)가
자신의 경기장을 장식하기 위해 40년 이집트에서 가져온 오벨리스크가 우뚝 서 있다.
이 오벨리스크는 로마로 옮겨진 뒤 경기장에 세워졌으나,
후에 경기장에서 죽은 순교자들을 기념하기 위해 1586년 지금의 위치로 옮겨졌다.
뒤에 오벨리스크 꼭대기에 알렉산데르 7세 가문의 문장과 십자가가 장식되었는데...,
이집트 사람들에게는 약탈 문화재를 대표하는 상징물로 인식될 만큼 많은 굴곡을 겪은 건축물이다.
높이는 25.5m, 무게는 320t이다.
오벨리스크 좌우에는 마데르나(Carlo Maderna)와 폰타나(Carlo Fontana)가 각각 만든 2개의 아름다운 분수가 있다.
베드로가 순교한 곳으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광장이자, 베르니니의 대표적인 걸작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산피에트로 대성당(St. Peter's Basilica )
성베드로대성당이라고도 한다.
가톨릭의 총본산으로서 유럽 역사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교황청의 산피에트로대성당 관리 성성(聖省)의 관리하에 있다.
그 역사는 깊어서 기원으로 말하면 성(聖)베드로의 무덤 위에 세워진 4세기의 바실리카식 성당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16세기 미켈란젤로를 비롯한 당시의 대표적 건축가들에 의해 전성기(全盛期)를 맞은 르네상스의 건축이념에 바탕을 두고 재건되었다.
15세기에 한 번 시도되었다가 중단되었던 구당(舊堂)의 개수계획을 재개하기 위해
1506년 교황 율리오 2세가 저명한 건축가 D.브라만테에게 명하여 본격적인 공사에 착수하게 하였다.
브라만테는 그리스 십자식플랜의 중심에 대원개(大圓蓋)를 얹고,
네 구석에 한 개씩의 작은 원개를 얹는 구상을 세운 듯, 대원개를 떠받칠 4개의 큰 지주와 그것들을 잇는 4쌍의 아치를 완성하였다.
그가 죽은 뒤 라파엘로가 여기에 긴 회당부(會堂部)를 추가한 라틴 십자식 플랜을 계획하였으나
그도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을 뜨고 공사는 바르다살레 베르레의 손을 거쳐 A.P.da 상갈로에게로 넘어갔다.
그도 또한 궁륭(穹窿)의 일부를 착수하였다가 1546년에 세상을 떴으나,
그동안 역대의 건축담당자들이 이 조영(造營)사업에 기울인 정열은 건물의 계획을 놀랍도록 변경시켰다.
1546년 교황 바오로 3세는 마침내 71세의 미켈란젤로에게 공사의 전권을 맡겼다.
그는 그리스 십자식 플랜을 채용함으로써 브라만테의 안(案)으로 돌아가는 듯하였으나,
브라만테의 그것과는 달리 네 구석의 작은 원개를 없애고
건물 전체의 긴밀한 조형성과 다이내믹한 공간을 대원개를 중심으로 유기적으로 통일한다는 탁월한 구상을 생각해내었다.
그는 1564년 그의 생애를 마칠 때까지 대원개의 기부(基部)에 해당하는 탕부르의 공사에 심혈을 기울였다.
직경 42.4m, 바닥에서 탑 십자가까지의 높이가 약 133m에 달하는 이 원개 공사는 그가 남긴 목제(木製)의 모형과 함께
1588년 자코모 델라 볼타에게 인계되었고, 다시 도메니코 폰타나의 손으로 넘어가 1590년 마침내 완성되었다.
건물 전체의 역동감을 그 아름답고 힘찬 곡선에 모았다가 허공에 해방시키는 듯한 이 훌륭한 원개는 그러나,
17세기 초기 신랑(身廊)의 전면(前面) 연장과
정면 가득히 펼친 칸막이와 같은 파치아타(서쪽 정면)의 증축으로 인해 그 효과가 크게 손상되었다.
헌당식(獻堂式)은 1622년에 거행되었고, 마침내 명장 G.L.베르니니가 나타나,
1655년에서 1667년에 걸쳐 원주회랑으로 에워싸인 훌륭한 정면 광장을 완성시켰다.
투시효과를 교묘히 이용한 이 훌륭한 광장은 가톨릭의 총본산에 어울리는 규모와 성격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C.마데르나에 의해 정면구성으로 손상된 대성당의 모습을 살리는 역할을 하고 있다.
산피에트로 광장(Piazza San Pietro)회랑 열주
입구에서 좌우로 안정된 타원꼴이며, 가운데서 반원씩 갈라져 대칭을 이룬다.
좌우 너비는 240m이다.
정면 끝은 산피에트로대성당(성베드로대성당)의 입구에 해당한다.
반원형인 광장 좌우에는 4열의 그리스 건축양식인 도리스양식 원주 284개와 각주 88개가 회랑 위의 테라스를 떠받치고 있다.
나보나 광장(Piazza Navona) 분수대 앞
로마에서 가장 아름다운 광장으로 피우미 분수로 유명하다.
광장 주변의 건물들은 1세기의 로마 황제 도미티아누스가 세운
도미티아누스 스타디움(Stadium of Domitianus)의 관람석 자리를 토대로 건설되었다.
나보나 광장(Piazza Navona) 분수대
광장 일대 건축물의 대표적 양식은 바로크 양식으로
넵튠분수, 모로분수, 피우미분수(Fontana Dei Fiumi)와 주변 건물들이 함께 아름다운 조화를 이룬다.
광장 중앙에 있는 피우미분수는 베르니니가 디자인했다.
피우미분수에 조각되어 있는 4명의 거인은 갠지스강·나일강·도나우강·라플라타강을 나타낸다.
광장 남쪽의 모로분수는 돌고래와 싸우는 이디오피아인의 모습을, 북쪽의 넵튠분수는 넵튠이 문어와 싸우고 있는 모습을 나타낸다.
트레비 분수(Trevi Fountain)
로마에서 가장 거대하고 가장 유명한 분수로 관광객들이 던진 동전이 항상 쌓여 있다.
뒤를 돌어 동전을 던지면 로마에 다시 오게 된다는 속설 덕택이다.
로마의 분수, 로마를 보여주다
유랑이나 여행에 비해 ‘순례’는 종교적인 목적의 여행이다.
로마는 기독교의 성지이니 예로부터 수많은 순례자들이 몰려온다.
그리고 로마를 찾는 모든 이들은(단순 여행자이든 순례자이든) 광장마다 골목 모퉁이마다,
크고 작은 분수들이 물을 뿜고 있는 모습에 기쁨과 활력을 느낀다.
영국의 시인 셸리는 분수에 대해, “로마의 분수를 보는 것은 로마 전체를 보는 것과 똑같다”라고 예찬했다.
이 분수들은 예로부터 로마를 찾아오는 순례자들의 더위를 식혀주고, 또 목을 축여주기도 했다.
포폴로 광장과 유서 깊은 캄피돌리오 언덕을 연결하는 비아 델 코르소를 걸어본다.
그러다가 큰 길에서 들리는 소음을 피해 좁은 골목길로 들어선다.
자동차들이 달리는 소리가 차츰 사라지고, 멀리서 물소리가 조금씩 들리기 시작한다.
마치 자연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하다.
골목 속으로 더 깊게 빨려 들어가면 물소리는 더욱 더 커진다.
그러다가 갑자기 확 트인 광장이 눈앞에 펼쳐지고 시원한 물소리가 귀에 가득 차오른다.
황갈색의 건물로 둘러싸인 광장의 북쪽 면에는 하얀 대리석 조각들이 무대처럼 펼쳐져 있고
그 한가운데에는 대양의 신 오케아노스가 두 마리의 말이 이끄는 거대한 조개껍질 모양의 마차에 올라서 있다.
이 두 말을 바다의 신 트리톤이 이끌고 있다.
두 마리의 말은 각각 고요한 바다와 격동의 바다를 상징한다.
오케아노스의 좌우에 있는 조각들은 각각 풍요와 건강을 상징하며, 그 앞에 펼쳐진 넓은 수반은 바다를 상징한다.
이것이 바로 로마의 후기 바로크시대의 걸작품 트레비 분수이다.
이 분수는 1732년, 젊은 건축가 니콜라 살비의 계획안에 따라 착공되어 우여곡절 끝에 1762년에 완성되었다.
오래 전부터 로마를 찾아오는 관광객들은 로마에 다시 오기를 기원하면서 등 뒤로 분수에 동전을 던진다.
트레비 분수를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공간의 구성이 격렬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매끄럽게 깍은 돌 수반이 주는 부드러운 느낌은 거칠고 울퉁불퉁한 바위와 강한 대비를 이루며,
분수의 물은 작은 폭포가 되어 수반에 흘러내리고, 물소리 속에 부드러운 대리석으로 조각된 바다의 신과 사나운 군마(軍馬)가 하얀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이 광경 뒤에는 수직의 기둥들, 좌우의 조각상, 그리고 육중한 돌림띠를 두른 르네상스 건물의 벽면이 이 격정적인 ‘무대’를 고요히 조율하고 있다.
그리고 흘러내리는 물위에는 한낮의 햇빛이 눈부시게 반사된다.
이런 트레비 분수의 인상을 시로 옮긴 사람이 있다.
그는 이 한 편의 시를 글이 아니라 음악으로 써냈는데, 이런 시를 우리는 ‘교향시’라고 부른다.
이 ‘시인’은 볼로냐 태생 레스피기(O. Respighi 1879~1936)로, 그는 당시 로마 산타 체칠리아 음악원장을 역임하고 있었다.
그의 작품 「한낮의 트레비 분수」(La Fontana di Trevi al meriggio)는 교향시 『로마의 분수』의 세번째 곡이다.
비발디가 18세기 초 이탈리아의 기악음악을 최고의 수준으로 끌어올린 사람 중 한 명이라면,
레스피기는 20세기 초 쇠퇴해 가는 이탈리아 오페라 음악을 대신하여 기악음악으로 새로운 장을 연 대표적인 사람 가운데 하나이다.
이탈리아는 바로크시대까지만 하더라도 전 유럽의 음악가들이 몰려오던 나라였으나,
19세기 전반에 들어서는 유럽 다른 나라에 비해 기악분야가 크게 뒤져 있었기 때문에 이탈리아의 음악도들은 오히려 이탈리아를 떠나야만 했다.
그 당시 이탈리아는 단지 오페라로 음악문화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때의 열악한 기악음악 상황은 로마에 체류한 적이 있는 베를리오즈의 『회고록』에서도 엿볼 수 있다.
나는 왕의 탄신을 축하하는 미사에 참석했다.
프랑스 대사는 로마의 초일류 합창단, 오케스트라를 초빙하여 미사음악을 담당하게 하였다. 그
런데 오르간 소리는 1/4음 정도 낮은데다가, 소리가 너무 커서 오케스트라 주자들은 각각 엉뚱한 소리를 낸다.
플루트는 D로, 혼은 E플랫으로 연주하는가 하면 다른 악기들도 갈팡질팡한다.
그러다가 이 오르간이 전대미문의 기묘한 피날레를 장식했다.
이런 일들이 문화인들 앞에서 스스럼없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렇게 기악이 뒤처진 이탈리아에 베토벤이 소개되기 시작한 것은 1860년대에 접어들면서부터였다.
다행히 1880년대에는 약속이나 한 듯 레스피기를 이어 피젯티, 말라피에로, 카스텔 누오보테데스코, 잔도나이 등의 음악가들이
태어나 뒤떨어진 기악음악 수준을 이끌어 올리는 데에 온 힘을 쏟았다.
이들을 ‘80년 세대’(Generazione dell’ Ottanta)라고 하는데, 그 중 레스피기는 러시아로 유학을 가서 림스키코르사코프의 가르침을 받는다.
그는 지난날의 영광을 되살리고 이탈리아적인 색채를 찾는 데 열정을 쏟았다.
그리하여 탄생한 것이 ‘로마 3부작’, 즉 「로마의 분수」,「로마의 소나무」,「로마의 축제」이다.
그는 음악사의 뒷전으로 밀려버린 이탈리아에 새로운 길을 제시한 선지자와 같은 존재였다.
그러나 그의 음악은 화려한 지난날의 영광에 도취되어 있던 이탈리아 사람들에게 생소하게만 들릴 뿐이었다.
선지자의 외침은 자기가 태어난 땅에서는 제대로 들리지 않는 모양이다.
캄피돌리오 광장(Piazza del Campidoglio)
고대 로마의 발상지로 전해지는 7개 언덕의 하나인 카피톨리노언덕 한 모퉁이에 미켈란젤로의 구상으로 1547년에 건설되었다.
큰 계단 위에 전개된 이 광장은 좌우 양쪽의 한 쌍의 건물이다.
즉 카피톨리노박물관(1644∼1655)과 팔라초 콘세르바토리(1564∼1568) 및 안쪽 정면의 시청사(1592년 완성)의 3개 건물로 둘러싸여 있다.
좌우 건물이 마주보는 간격은 투시효과(透視效果)의 조화를 위하여 바깥쪽에서 안쪽으로 향할수록 넓어지게 배치되어 있다.
광장 중앙에는 로마의 현제(賢帝)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기마상(騎馬像)이 있다.
광장과 건물의 디자인은 그 수법의 독창성과 공간통일(空間統一)의 탁월성으로 해서 미켈란젤로의 가장 뛰어난 건축작품으로 꼽히고 있다.
쌍둥이 형제 로물루스와 레무스가 태어나 늑대의 젖을 먹고 자라났다.
로마라는 이름은 형 로물루스의 이름에서 유래하였다.늑대는 로마의 상징이 되었다.
로마는 이탈리아 반도의 중부, 서부해안 가까이에 위치하고 있는데, 그 기원은 기원전 75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신화에 의하면, 레아 실비아와 군신 마르스 사이에 쌍둥이 형제 로물루스와 레무스가 태어나 늑대의 젖을 먹고 자랐다.
테베레강이 굽어보이는 팔라티노 언덕에 성곽을 쌓음으로써 로마의 역사는 시작되었다고 한다.
후에 동생 레무스는 로물루스에게 죽음을 당하고, 형 로물루스는 통치권을 장악하였다.
이로써 골육상잔의 역사도 역사의 여명과 함께 시작되었다.
로마의 이름은 형 로물루스의 이름에서 유래하였고, 늑대는 로마의 상징이 되었다.
로마의 지붕과 하늘이 맞닿는 부분은 소나무 숲의 실루엣과 산 피에트로 대성당의 돔으로 이루어진다. 크고 작은 수많은 성당들의 종탑들과 둥근 지붕선, 그리고 판테온, 콜로세움 등 고대로마의 역사적인 건물들의 모습이 눈에 먼저 띄고, 그 사이로 군데군데 푸른 소나무 숲들이 펼쳐져 있다. 찬란한 과거와 다양한 현재가 잘 어우러진 로마. '영원한 도시' 라는 로마는 2700년이나 되는 장구한 역사를 지닌 도시이다.
로마 시내에 있는 콘설바토리 궁전에는 늑대가슴에 매달린 루물루스·레무스 쌍둥이 형제의 동상이 있어 보는이의 마음을 울리게 한다.
로마의 언덕 위에 서본다.
진실의 입
산타마리아 인 코스메딘 성당 안에 있는 진실의 입을 보기 위하여 수많은 사람들의 순서를 기다리다 자기 차례가 되면 사자의 입속에 손을 넣고 기념사진을 찍는다.
이것은 1953년 명배우 ‘그레고리 펙 과 오드리 헵번’이 열연했던 명화 ‘로마의 휴일’에 나오는 한 장면으로
진실하지 않은 사람이 진실의 입에 손을 넣으면 손이 잘린다는 전설이 있어 그래고리팬이 사자의 입에 손을 넣고는 손이 짤린듯이 흉내를 내는 장면이 나온다.
매력과 마력의 도시 로마
지중해 상공을 한번 날아본다.
눈부신 햇살을 머금은 푸른 바다가,흥망성쇠의 역사를 삼켜온 바다가,끝없이 펼쳐진다.
바다는 고요하다.
하늘에는 오렌지 향기, 소나무 향기가흩날린다.
지중해의 중앙부분에 위치한 이탈리아는 남북으로 비스듬히 장화처럼 길게 뻗은 반도이다.
고대 지중해 문화는 이 이탈리아 반도의 해변을 따라 꽃피기 시작하였다.
로마가 태어나기 훨씬이전부터 이탈리아반도의 중북부에서 번영하던 에트루리아와 이탈리아 남부와 서부 해안에 정착한
그리스 사람들이 이루어 놓은 마냐 그레치아(Magna Grecia: 대 그리스)는 그 값진 문화유산을 로마인들에게 물려주었고,
또 이를 물려받은 로마인들은 대제국을 건설하여 그들이 발전 시켜온 문화를 전 유럽에 전파하였다.
이로써 이탈리아 반도는 서양문화의 요람이라는 위치를 차지하기 시작했다.
로마는 이탈리아 반도의 중부, 서부해안 가까이에 위치하고 있는데, 그 기원은 기원전 75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신화에 의하면, 레아 실비아와 군신 마르스 사이에 쌍둥이 형제 로물루스와 레무스가 태어나 늑대의 젖을 먹고 자라나,
테베레강이 굽어보이는 팔라티노 언덕에 성곽을 쌓음으로써 로마의 역사는 시작되었다고 한다.
후에 동생 레무스는 로물루스에게 죽음을 당하고, 형 로물루스는 통치권을 장악하였다.
이로써 골육상잔의 역사도 역사의 여명과 함께 시작되었다.
로마의 이름은 형 로물루스의 이름에서 유래하였고, 늑대는 로마의 상징이 되었다.
로마의 언덕 위에 서본다.
로마의 지붕과 하늘이 맞닿는 부분은 소나무 숲의 실루엣과 산 피에트로 대성당의 돔으로 이루어진다..
크고 작은 수많은 성당들의 종탑들과 둥근 지붕선,
그리고 판테온, 콜로세움 등 고대로마의 역사적인 건물들의 모습이 눈에 먼저 띄고, 그 사이로 군데군데 푸른 소나무 숲들이 펼쳐져 있다.
로마의 길을 걸어본다.
그 길에는 오랜 전설과 역사를 간직한 유적들과 시대와 양식이
다른 건축, 조각, 기념비들이 서로 중첩이 되어 있으면서도 이질감을 주지 않고 공존해있다.
옛모습을아직도 그대로 지니고 있는 로마의 길을 걷다보면, 다른 나라의 도시에서는 쉽게 느낄 수 없는묘한 재미가 있다.
골목길을 돌 때마다 마주치는 크고 작은 분수들이 가는 길을 멈추게 한다.
이 분수들은 옛부터 로마를 찾아온 순례자들의 목을 축여주었으리라.
마치 미로와도 같은 좁은길을 걷더라도 멀리 보이는 오벨리스크의 모습이 방향을 인도해준다.
그러다가는 갑자기 시야와 가슴을 한껏 열어주는 광장이 펼쳐진다.
감격의 눈물이 왈칵 쏟아질 듯하다.
로마의 광장에는 예술사에 빛나는 위대한 건축가, 조각가들이 만든 분수들이 시야의 구심점을이루고 있다.
지중해의 햇살이 가득하고 분수소리 들리는 로마의 광장에 앉아 이탈리아산 포도주를 한잔 들고 졸리는 눈을 가만 뜨고 있으면...
광장을 에워싸고 있는 건축물들에 몸전체가 안기는 듯한 환상에 빠진다.
로마의 길을 다시 한번 걸어본다.
거리의 시계들이 가리키는 시각이 모두 다르다.
서로 다른 시간들이 동시에 공존하기 때문에 로마를 <영원의 도시>라고 부르는 것일까?
길에는 오토바이,자동차들이 어지럽게 질주하고, 경찰차, 앰불런스들도 굉음을 토하면서 좁은 도로를 뚫고 다닌다.
로마는 우리 나라와 달리 기존 건물과 도시구조를 함부로 뜯어고치지 못하게 되어있는데,
그것은 이 도시의 역사성과 예술성을 철저하게 존중하기 있기 때문이다.
로마는 옛날 도시구조속에 현대의 삶을 담아야하기 때문에 기능적인 측면에서 여러 가지 문제점이 발생한다.
어지럽고 시끄럽던 로마의 거리는 보통 오후 1시부터 4시까지는 조용해진다.
로마사람들의 하루 생활 가운데 매우 중요한 시간인 점심시간과 낮잠시간이다.
이 시간에는 상점들은 대부분문을 닫고 사람들은 집에 돌아가 푸짐한 점심과 단잠을 즐긴다.
이때 남의 집을 예고 없이 방문하는 것은 대단한 실례가 된다.
로마의 심장부를 남북으로 가르는 거리인 비아 델 코르소를 걸어본다.
이 길은 남쪽으로는 이탈리아 통일 기념관이 있는 베네치아 광장과 캄피돌리오 언덕,
그리고 북쪽으로는 포폴로 광장을연결하는 중추신경과도 같은 거리이다.
베네치아 광장으로부터 남쪽에는 고대로마의 유적이 즐비하고,
비아 델 코르소의 좌우에는 넓고 좁은 골목들이 실핏줄처럼 연결되어 있다.
이 주변에는 중세와 르네상스 그리고 바로크 시대의 건물과 기념비들이 밀집하여 있으며,
또한 오늘날 로마의 정치와 경제의 중심 기관들도 이곳에 몰려 있다.
판테온, 나보나 광장, 트레비 분수, 스페인광장, 또 로마의 유행의 거리인 비아 콘돗티도 바로 이 지역에 있다.
그래서 이곳은 항상 세계각국에서 온 관광객들과 이탈리아 각지에서 온 사람들로 붐비고 있는데,
그들이 이 길에 쏟아놓는 말들은 비아 콘돗티에 휘날리는 만국기처럼 가지각색이다.
그중 이탈리아 말이 유난히 귓전을 따갑게 때린다.
그것은 이탈리아 사람들이 말하기를 워낙 좋아하는데다가,
또한 이탈리아 말 자체가 자음과 모음이 명료하고,
또 거의 모든 단어들이 모음으로 끝나서 소리를 멀리까지 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탈리아 사람들은 선천적으로 공명이 잘되는 성대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요소들 덕분에 이탈리아에서는 성악이 발달할 수 있었으리라.
그러나 이탈리아 사람들은 누구나 노래를 잘 부른다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노래를 잘하는 사람은 너무 잘하지만, 보통 이탈리아 사람들은 노래를 별로 즐기지 않는다.
재도 남기지 않고 모든 것을 태워버릴 듯한 지중해의 여름 태양이 지고나면, 로마의 길과 광장에는 사람들이 쏟아져 나온다.
그래서 로마의 유적과 광장들은 밤이 되면 여러 가지 공연이 이루어지는 무대가 되기도 한다.
그 중에서도 특히 카라칼라 황제 목욕장의 폐허는 한동안 대규모 야외 오페라 공연장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시대, 종교, 국적, 언어, 문화, 사회계급을 초월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로마를 찾아 온다.
어떤 사람은 잠시, 어떤 사람은 오랫동안 로마와 로마인들의 삶을 엿보고 나름대로의 인상을 갖는다.
방치된 듯한 유적들이며, 낙서로 더럽혀진 문화재들이며,
그리고 공공질서, 책임감, 신속성과는 거리가 먼 로마 사람들의 생활 습성이며,
또 관광객들을 노리는 각국 소매치기들과 집시들을 보고는 인상을 찌푸리다.
그러면서도, 로마를 떠날 때에는 모두 트레비 분수에 동전을 던진다.
로마에 다시 돌아오기를 기원하면서....
로마는 겉보기에는 아름다움과 추악함이 뒤엉켜 있는 듯하다.
그러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가 잊고 있던 삶의 기쁨을 상기시켜주는 듯하다.
로마를 좀더 안으로 들여다보자.
그 바닥에는 깊은 종교심과 건전한 가치관이, 또 남을 앞질러 가는 창조력이 3천년 역사의 맥을 이어 흐르고 있다.
로마의 이러한 저력은 아직도 생생하게 살아 있는
오랜 역사와 문화적 예술 환경이라는 토양 속에 깊게 내려져 있는 뿌리로부터 솟아 올라오는 것이리라.
판테온(Pantheon)신전
아그리파 집정관에 의해 처음 건축된 판테온은
로마에서 발생한 대화재로 완전히 소실되었고 이후 하드리아누스 황제 때 로마를 재건하기 위한 계획으로 다시 건축되었다.
당시 판테온은 어떤 용도로 사용되었는지 정확하게 전하는 바 없으며 현재는 신전으로만 알려져 있다.
아그리파 집정관 때 처음 만들어진 건축의 흔적으로는 석판이 남아있는 것으로 전한다.
원형 본당(本堂)의 안지름과 천장의 높이 43.2m, 벽의 두께 6.2m.
북측 입구에 코린트식 8주 전주식(前柱式)의 돌출랑(突出廊)이 있으며, 기둥 높이는 12.5m이다.
당 내부에는 7개의 벽감(壁龕:神像을 안치한 작은 방)이 설치되어,
제우스·아폴론·아르테미스·헤르메스(메르쿠리우스) 등 다신교였던 로마에서 중요 신들이 모셔졌다.
돔의 내측은 원개 천창(天窓) 부분을 제외하고는 28열의 방사상 격간(格間)으로 덮여 있고, 각각의 격간은 5단으로 되어 있다.
채광은 돔 정상에 설치된 지름 9m의 천창뿐이며, 벽면에는 창문이 없고, 거대한 본당의 외형에는 전혀 장식이 없다.
그 수적 비례의 미와 강대한 내부 공감의 창조라는 당시의 경이적인 토목기술로서 서양건축사상 불후의 명작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브루넬레스키가 판테온의 돔 건축 방식을 채용해
피렌체 대성당의 돔을 건축하였고 이로인해 그는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건축가로 인정받았다.
609년 판테온은 교황 보나파시오 4세에 의해 가톨릭 성당(Basilica di Santa Maria ad Martyres)으로...
개축되어 사용되었는데 중세를 거치면서 건축물이 훼손되는 것을 그나마 막을 수 있었다.
르네상스 시대 판테온은 무덤으로 사용되었는데 이탈리아의 거장 화가였던 라파엘로와 카라치가 묻혀져 있고
이탈리아의 왕 빅토리오 임마누엘레 2세, 움베르토 1세도 판테온에 묻혀져 있다.
현재의 판테온은 가톨릭 성당으로 이용되고 있으며 미사가 집전되거나 가톨릭 종교 행사장으로 이용되고 있다.
판테온이라는 명칭은 오늘날 국가적 영예가 있는 자에게 바쳐지는 건물이라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카라칼라욕장(Terme di Caracalla)을 배경으로
Baths of Caracalla.
고대 라틴어 이름은 Thermae Antoninianae.
카라칼라대욕장(Terme di Caracalla)
로마 시대에 만들어진 콘크리트 건물. 로마시(市) 첼리오구릉의 남쪽에 있다.
수많은 목욕탕 중에서 규모가 가장 컸던 것으로 216년에 개장하였는데, 내장공사(內裝工事)는 그 후에도 계속되었다.
카라칼라가 장병을 휴양시키고 시민의 인기를 얻기 위하여 지은 것인데, 현재 해마다 여기에 무대와 객석을 가설하여 야외오페라를 공연하고 있다.
바닥의 모자이크 등이 일부 남아 있을 뿐이지만,
당시는 아름다운 대리석으로 벽면을 장식하였고, 곳곳에 조상(彫像)과 분천(噴泉)이 있어 지극히 호화로웠다고 한다 로마 대욕장으로는 유일하게 아직도 많은 부분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이루어져 있으며.
욕실에 딸린 방과 중정 둘레로 체조장과 운동경기를 할 수 있는 정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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