폼페이(Pompeii)-이탈리아
나폴리에서 남서쪽으로 23km 떨어진 베수비오 산 근처에 있다.
사르누스(지금의 사르노) 강 어귀 북쪽으로 흘러든 선사시대의 용암에 의해 형성된 돌출부 위에 건설되었다.
폼페이는 79년 베수비오 화산의 격렬한 폭발에 의해 헤르쿨라네움 및 스타비아이와 함께 매몰되었다.
이 고대도시들의 유적들은 그리스·로마 시대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독특한 자료가 되고 있다.
오늘날의 폼페이 시(인구 2만 5,081명[1991])는 고대도시의 동쪽에 이다.
순례요지인 산타마리아델로사리오 바실리카가 있다.
폼페이의 중심 시민포럼. 뒤에 주피터 신전이 있고 멀리 베수비오 화산이 보인다.
폼페이(Pompeii)
고대 폼페이의 유적지는 79년 화산 폭발이 있었던 베수비오 산 아래에 있는 드넓은 지역이다.
돌과 화산재에 묻혀 있던 이 도시는 1748년에서야 발굴 작업이 시작되었고, 그 당시 모습 그대로의 도시가 드러났다.
모든 건물들은 보존되어 있었고, 간혹 그림과 조각이 가득한 건물도 있었다.
이 곳에서는 과거의 숨결이 아직도 생생하다.
AD 79년 8월 24일 파괴적인 화산 폭발이 폼페이 시내를 암석과 재가 가득한 7m 아래 지하에 묻어버렸다.
15,000 여명의 주민이 사망하였다.
오스칸과 삼늄 민족에 기원을 둔 로마 제국 도시 폼페이는 8개의 게이트가 있는 3km에 달하는 개방형 성곽으로 둘러 쌓여있다.
성곽 안에는 규칙적으로 정리되어 있는 도로망으로 나뉘어 있는 도시였다.
과거로부터 다시 출현한 오늘날의 폼페이의 엄숙한 유적지와 일반 주택 및 상점을 방문할 때는 몇 가지 팁이 있다.
주요 볼거리에는 바실리카(Basilica) 앞에 있는
거대한 포룸(Forum) 광장과 베스타 여신, 쥬피터, 아이시스를 위해 세워졌던 사원들..
훌륭한 스타비안(Stabian Baths) 스파, 크고 작은 극장과 12,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원형 경기장이 있다.
도로망은 여전히 자갈이 깔려 있으며, 큰 재앙 전의 주민들의 생활을 가늠하게 하는 호화스러운 저택들로 이어져 있다.
파우노(Fauno), 아모리니 도라티(Amorini Dorati), 메난드로(Menandro)의 저택들은 프레스코화와 조각들로 가득하다.
쥴리아 펠리체(Giulia Felice)와 디오메데(Diomede)의 저택은 더욱더 화려하다.
성곽 밖에 있는 빌라 데이 미스테리(Villa dei Misteri)는 꼭 방문해봐야 할 특별한 저택이다.
이 곳에는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커다란 벽화가 있다.,
고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술의 신, 디오니소스의 비밀 의식을 묘사하고 있다.
폼페이의 최후
향락만을 일삼던 폼페이에 신의 내린 벌이었을까?
서기 62년 엄청난 지진으로 폼페이는 일순간 잿더미가 되고 수없이 많은 사망자가 발생한다.
도시는 폐허가 되었고, 생존자들은 불굴의 노력으로 재건을 위해 힘썼으며, 점차 산업, 상업 활동들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재앙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서기 79년 8월 24일(11월 24일이라는 설도 있음),
폼페이인 들이 사화산으로 알고 있었던 베수비오 화산이 엄청난 생명력을 가친 상태로 되살아난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베수비오는 대 분화를 시작했고 폼페이의 모든 것을 삼켜버렸다.
그리고 몇 안 되는 생존자들조차 지진, 해진, 그리고 베수비오 화산이 내뿜는 화산(유황) 가스에 의해 대부분 사망하고 만다.
그렇게 폼페이는 '저주 받은 도시'라 일컬어 졌다.
때문에 화산 폭발 전 미리 도시를 떠났거나 가까스로 살아남은 이들은,
자신이 폼페이에서 온 사람이라는 말은 물론 폼페이에 대한 어떠한 것도 발설하지 않았다.
저주 받은 도시에서 온 사람이라는 결코 달갑지 않은 꼬리표가 따라붙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폼페이는 사람들에게서 서서히 잊혀져 갔다.
공공 광장(Foro)
폼페이의 정치, 경제, 종교 생활의 중심지로,
넓이 157m의 광장 주변에는 바실리카, 아폴로 신전, 마첼룸, 성당 등의 공공 건축물로 둘러쌓여 있다.
광장의 회랑에는 응회암으로 만든 도리아식의 기둥과 이오니아식 기둥이 있어 눈길을 끈다.
발굴 당시 광장 주변에서 많은 석상들이 발굴되기도 하였다.
제우스 신전(Tempio di Giove)
포로 북쪽 끝에 세워진 제우스 신전은, 기원전 150년 과거 에트루스코 신전이 있던 자리에 세워진 것이다.
이후 로마 공화정 시대에는 폼페이에서 가장 중요한 신전의 역할을 하였다.
2단 층계가 있는 높이 3m 단상 위에 세워진 제우스 신전은 2중의 기둥으로 둘러 싸여 있다.
과거 내부에는 헤라, 제우스, 아테나의 석상이 있었으며 현재 나폴리 국립 고고학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기원전 79년 8월 폼페이는 베수비오 화산의 폭발로 완전히 붕괴되었다.
세 시간이 넘는 폭발로 도시는 4미터 이상 쌓인 화산재 아래로 묻혔고, 총 인구 2만명 중 약 2천명이 사망했다고 한다.
발굴된 폼페이의 거리는 한 변이 약 2km인 사각형 모양의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거리의 서쪽에 치우친 부분에 포름(공동 광장)이 있고 그 위위에 신전과 공설 시장, 시의 관공서 등이 있다.
포름은 도시의 종교·정치·경제의 중심지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도로는 모두 포장되어 있으며, 차도와 보도가 구분되어 있었다.
신전이 여러 개 있었다.
사진은 그 중 초반에 만난 신전 한군데의 모습이다.
고대 폼페이의 광장 회의장이 있던 곳이라 한다
이곳 저곳 유적지에는
그때 삶의 흔적들이 엿보이며 얼마나 화려하고 웅장하고 호화로웠는지 그 잔재와 흔적이 여전히 남아 있다다.
폼베이는 역사의 베일에 가려진 채 1700년 동안 4~8미터 화산 잿더미속에 말없이 파묻혀 있었다.
문헌에는 로마 귀족들의 휴양도시이자 환락의 도시였다는 기록이 있으나 실제 그곳이 어디인지 행적을 모르다가
1709년 4월 어느 날 수도원 뜰,
우물 작업을 하던 인부의 곡괭이에 걸린 쇠붙이가 계기가 되어 마침내 세상에 그 정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고 한다
베수비오 화산은 이탈리아 나폴리 만 해안에 우뚝 솟아 잇는 화산이다.
폼페이는 이 화산의 남쪽에 있었다.
베수비오 화산은 기원전 8세기에 대분화를 일으킨 후, 휴식을 취하고 잇는 것처럼 보였다.
폼페이를 멸망시킨 대폭발이 일어난 것은 기원전 79년 8월 24일 정오 무렵이다.
폭발은 갑자가 일어났지만, 8월 중순부터 작은 지진이 계속 일어나는 등 폭발 전부터 몇 가지 징조가 있었다고 한다.
쇼핑백을든 이 할아버지의 정체는 무엇인가~~?
잘 정돈된 계획도시가 하루 아침에 그대로 화산재에 덮혀 지붕은 다 타 없어지고,
돌기둥들과, 집 벽들만 남아 있지만, 옛날의 도시 형태와 살았던 사람들의 미이라를 보며 깊게 생각하게 한다.
발굴품 보관소/(Granai del Foro) 제우스 신전 바로 왼쪽에는 곡물 창고로 쓰이던 넓은 창고가 있다. 현재 이곳에는 상당한 수의 폼페이 발굴품이 보관되어 있으며 그중 화산 폭발 희생자의 생생한 석고 모사를 볼 수 있다. 그 중 견공 석고모사, 토기 등이 눈에 띄는데 이렇다 할 보호 장치 없이 보관 아닌 보관되어 있어 마치 방치된 느낌을 받는다. 그러니 관광객은 '와! 시체다!' 이러고 넘어 갈 수밖에 없을 일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관광객이 시체의 미라라고 생각하는 석고모사의 제작과정은, 화산 폭발 시 용암 등의 고열물질에 묻힌 시신은 대부분이 녹게 되고 그 자리에 시신의 원형에 가까운 공간이 생기는데, 그 속에 석고를 부어 굳힌 것이다. 물론 시신의 유골 등이 일부 남아있을 수 있지만 폼페이에서 보게 되는 대부분이 이러한 과정을 거친 것이다.
발굴품은 전시일정 등을 이유로 위치가 변경될 수 있다.
스타비아네 욕장(Terme Stabiane)
로마의 폼페이 입성 직후 본래에 있던 것을 확장 개축한 목욕탕으로 가장 크고 오래되었으며 보존상태 또한 가장 온전한 곳이다..
사다리꼴의 정원 회랑에는 두꺼운 석회층으로 덮여진 응회암 석기둥이 세워져 있다.
주위로 냉, 온탕, 사우나, 탈의실 등 다양한 시설이 분포되어 있는데 화려한 부조 장식이 인상적이다.
그 중 벽면 파내어 사각 선반을 만든 탈의실에는 베수비오 화산 폭발 당시의 희생자 석고모사를 볼 수 있다.
그밖에 입구 좌측에는 수영장과 체육관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것은 로마 제국시대에 축조된 욕탕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파우노의 집(Casa del Fauno)
파우노의 집 전경
고대 로마의 전형적인 부유층 저택의 형태인 파우노의 집은 폼페이에서 가장 아름다운 집으로 절대로 놓쳐서는 안 되는 곳이다.
약 4M X 110M의 넓은 대지에 세워져 있는 집은 산니타족의 도시였다.
폼페이가 로마에 정복된 이후 로마와의 이해관계 조정임무를 맡은 정복자 실라의 조카인 푸블리오가 살던 곳이다.
알렌산더 대왕의 전쟁 모자이크(복제품)
다양한 유적들이 발굴된 파우노의 집에서 눈 여겨 볼 것은 입구 현관 홀의 낙수받이 수조에 있는
'춤추는 파우노(목신)상'과 소 정원과 대 정원 사이의 방에 있는 모자이크 '알렉산더 대왕의 전쟁'이 있다.
단, 두 작품 모두 복제품으로 진품은 현재 나폴리 고고학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으니, 헷갈리는 일 없도록 하자.
폼페이 델라본단차거리 우리나라의 명동거리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상가, 주상복합 건물, 주택, 많은 여인숙들이 줄지어 있는 폼페이의 제일 번화가이다.
도로 옆으로 배수시설이 되있고 징검다리가 있어 길을 건너 갈 수 있게 하였다
우리가 사는 현대 모습과 너무도 비슷한 생활을 2000년 전에 누리고 살았다.
도로에는 차도와 인도가 나눠저 있고 길을 건널때는 저런 건널목을 통해서 건너고
사거리에는 지금의 사거리 모습과 똑같이 네모퉁이에 모두 건널목이 있고 도시의 구조가 정확히 바둑판식 배열이다....
거리의 사거리 가운데에는 공동 수도가 있다.
수도의 연관이 발견된 점으로 미루어 보아 수도는 집집마다 들어 갔던 것 같다.
곡식을 찧어서 빵까지 만들어 내던 곳이랍니다.
2000년전에 화산재속에 파 묻혓다가 나타난
이 검은돌들은 우리의 장구처럼 다듬어서 세워놓은것을 발견했다.
이것이 제분기란다.
즉 빵을 주식으로 삼은 삶의 흔적을 보았다.
로마는 이러한 제분기를 확보하여 먹는 문제를 해결함으로 세계를 정복하는 일에 일조했던 것이다 라는 가이드의 설명.
돌로 깔은 포장 도로, 대리석과 벽돌로 지은 벽과 집, 수도와 목욕탕, 극장, 레스토랑, 공중 화장실까지
갖추어져 있는 각종 시설은 현대 도시와 조금도 다를 바 없는 당시의 훌륭한 도시 계획을 보여 준다.
그 옛날에도 ... 이 집은 홍등가이다.
홍등가을 나타내는 간판이 그림으로 붙어 있었고 ..폼베이에서 유일하게 2층 건축물이다.
홍등가 안에 아직도 남아 있는 벽화 "춘화도"
원형 극장, 수용 인원은 약 8,000명 정도라는 기록인데, 실제 보면 20,00명도 넘게 들어 가는 수준이다.
작은 소리도 멀리 퍼지도록 설계가 잘 되어 있다.
대극장(Teatro Grande)
기원전 3세기 축조된 대극장은 이후
기원전 1세기 경 아우구스투스 시대의 건축가인 아르토리우스에 의해 확장 개축되며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극장은 약 5000명 이상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었으며,있었으며, 계급에 따라 좌석 차이를 두기도 하였는데,
무대 앞 흰색 대리석으로 마련된 좌석이 최상류층을 위한 것이다.
그 밖에 기후 변화에 유연히 대응할 수 있도록 극장 전체를 덮을 수 있는 전막장치를 무대 뒤 벽면에 마련해 놓기도 하였다.
무대 뒤 왼편에는 소극장이 마련되어 있으며,
정면에는 사각 회랑을 가진 광장이 있는데 본래 공연 전 관객들의 대기실로 사용하던 것으로
네로 시대에는 검투사들의 막사로 사용되었다.
대회랑(검투사들이 머물던곳)....
수천년전 화산재에 매몰되어 그대로 죽음을 맞이한 폼페이인과 수천년후 그들의 도시를 기억하고 싶은 이들이 만나는 곳.
폼페이는 이렇게 산 자와 죽은 자를 만날 수 있게 해주는 곳이다.
이탈리아 나폴리만 연안에 남서쪽으로 23Km 떨어진 베수비오 산 근처에 있으며,
사루누스(지금의 사르노) 강 어귀 북쪽으로 흘러든 선사시대의 용암에 의해 형성된 돌출부 위에 건설된 고대 도시다.
지금은 내륙이 되었으나, 당시에는 베수비오 화산의 남동쪽, 사르누스강 하구에 잇는 항구도시 였다고 한다.
'■-유럽 건축물 > ♣----이탈리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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