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티칸 미술관(Vatican Museum)-로마
바티칸의 산 피에트르 대성당에 인접한 교황궁 내에 있는 미술관이다.
역대 로마 교황이 수집한 방대한 미술품·고문서·자료를 수장하고 있다.
또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등의 대화가에 의한 내부의 벽화·장식으로 유명하다.
창설은 율리우스 2세(재위 1503∼1513) 때 벨베데레의 정원에 고대 조각이 전시된 것으로 시작되었지만....
일반에게 공개된 것은 클레멘스 14세 치하인 1773년이다.
현재 본관은 피오 클레멘티노미술관·도서관·성(聖)유물관·회화관 등 많은 부분으로 나뉘고있다.
또 각실은 보르지아실(室)·라파엘로실·지도실이라는 특유의 명칭으로 불린다.
미켈란젤로나 안젤리코의 벽화로 유명한
시스티나성당·파오리나성당·니코로 5세 성당 등도 미술관의 일부로 여기는 것이 보통이다.
피냐의 안뜰 (Cortile della pigna)
높이 약 4m의 거대한 솔방울이 있어 피냐의 정원이라 한다.
고대 로마 판데온 신전 근처에 있던것인데
중세때 옛 산 피에트로 대 성당에 전시한후 1608년에 이곳으로 옮겨졌다.
정원중앙의 청동작품은 1990년
아르놀드 포모도로의 작품으로 환경 오염으로 파괴되어가는 지구를 형상화한 작품이다
정원중앙의 청동작품은 1990년
아르놀드 포모도로의 작품으로 환경 오염으로 파괴되어가는 지구를 형상화한 작품이다.
높이 약 4m의 거대한 솔방울이 있어 피냐의 정원이라 한다.
뮤즈방 (벨베테레의 토로소 BC1세기경)
머리와 팔다리가 없이 몸통만 발견되어 토르소(통나무라는 뜻)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한다.
미켈란젤로를 포함한 많은 조각가가 이를보고 영감을 받어 작품을 만들었다.
"로뎅의 생각하는 사람"의 모델이기도 하다.
트로이 전쟁이 비운의 그리스영웅 아니네아스 장군의 자살직전 모습으로 추정하며.
만든 사람은 아테네의 아폴로니오라고 받침대가 새겨져 있으나 확인하바는 없다.
그외 뮤즈방에는 예술의 여신 뮤즈와 함께 그리스 시인들의 조각도 있다.
원형의 방
고대로마 판테온의 돔을 모방해 그절반 크기로 1780년에 만든 돔이 있는방이다.
네로의 황금궁전에서 옮겨온 중앙의 유적(개인욕조로 추정)과 바닥의 천연대리석 모자이크가 인상적이다.
그리스 십자가의 방
복도 양쪽으로 기독교를 공인한 황제 콘스탄티누스의 어머니 헬레나 성녀와 그의 딸 콘스탄제의 석관이 있가.
중앙 바닥의 천연대리석 모자이크도 눈여겨 볼만하다.
지도의 방
1580~1585년에 지질학자 이냐치오 탄티가 그린 40개의 지도가 있는 방이다.
이탈리아 반도가 프레스토 기법으로 그려졌는데 지금 지형과 비교해도 상당히 비슷하다고 한다.
황금빛 천정도 아름답다.
미켈란젤로 디 로도비코 부오나로티 시모니
(Michelangelo di Lodovico Buonarroti Simoni,)
(1475년 3월 6일 - 1564년 2월 18일)는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의 대표적 조각가, 건축가, 화가, 그리고 시인이었다
미켈란젤로는 카노사 출신의 귀족 로도비코 디 리오나르도 부오나로티 시모니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여인 사이에서 토스카나 지방 아레초 북부의 카프레세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1488년 가족과 함께 피렌체로 돌아왔는데,
유년 시절부터 조토와 마사치오의 작품들을 습작하며 그림에 많은 관심을 쏟아 집안에서 자주 꾸중을 들었다.
집안에서 미켈란젤로가 그림을 그리는 것을 싫어한 이유는 조선시대에 화가들이 사대부들에게
사소한 기술에 능한 환쟁이라고 불리며 멸시받은 것처럼, 미켈란젤로 시대의 화가들도 예술가로 존경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년 미켈란젤로의 재능을 알아본 메디치 가에서 아버지를 설득해준 덕분에 미켈란젤로는 미술공부를 할 수 있었다.
13세 때 화가 도메니코와 기를란다요에게서 배웠다.
이듬해 조각가 베를톨드에게 옮겨 도나텔로 작품을
배움과 아울러 메디치 가의 고대 조각품을 수집 연구하던 중 선생의 추천으로
피렌체의 실력자이자 예술가들을 후원하던
메디치 가문이 거느리고 있는 화가 집단에 들어가 대 로렌초의 총애를 받는다.
그 집에서 조각과 인체 해부에 전념하며 그는 신화와 신·구약 성서 등 많은 고전을 탐독하고 교양을 쌓았다.
1496년 로마로 나가 고대 미술과 접하고 이교적인 바쿠스를 제작하였다.
1499년 프랑스 추기경의 위촉을 받아 성 베드로 대성당의 피에타를 완성하였다.
1501년 피렌체로 돌아와, 시청의 위탁으로 다비드를 3년에 걸쳐 완성하였다.
계속하여 원형 부조인 성 모자를 만들고, 원형화 성 가족을 그렸다.
1504년 피렌체 시청의 위촉으로 대회장의 벽화 카시나 수중 접전도를 그리게 되었는데,
맞은편 벽에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앙기아리 기마 접전도를 그렸으므로 경쟁을 하게 되었다.
계몽사에서 만든 미켈란젤로 전기에 의하면 시장에 의해 경쟁하게 된 미켈란젤로와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사이가 나빠서 서로 무식하다느니, 바보라느니 하는 인신공격을 할 정도였다고 한다.
미켈란젤로가 인간의 한계를 뛰어 넘으며 그린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장화 " 천지창조"
1508년 바티칸 궁의 시스티나 예배당의천정화를 위촉받고 비둘기같이 허리가 꺽이는 듯한 고통에도 4년 만에 완성하였다.
1520년 메디치 가 예배당의 묘비를 10년에 걸쳐 조각하는 한편, 산 로렌초 성당 부속 도서관 입구를 건축하였다.
1529년 독일 카를 5세 군의 피렌체 포위 때 방위 위원으로 뽑혀 성을 쌓았다.
카를 5세의 이탈리아 공격당시 미켈란젤로는
사로잡힌 친구가 처형당한 사건때문에 도망가기도 했지만 마음을 고쳐먹고 다시 돌아와 방위 위원으로
활동했으며, 카를 5세에 의해 도시가 점령된 후에도 예술가를 우대하는 카를 5세의 배려로 미술을 계속 했다.
1508년 교황 율리오 2세는 미켈란젤로에게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을 그림으로 장식할 것을 명한다.
미켈란젤로는 4년 동안 발판 위에 누워서 작업을 하는 경직된 자세로 일해야 하였고,
이로 인해 관절염과 근육 경련을 얻었다.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감안료로 인해 눈병도 생겼다. 1512년 마침내 작품을 완성하였다.
교회를 화려하게 수놓은 천정벽화에는 복음서에서
언급한 그리스도의 선조로 시작하여 천지창조 이야기 등 구약 성서의 네 가지 사건이 그려져 있다.
아담의 창조(The Creation of Adam)
아담의 창조(The Creation of Adam)는 미켈란젤로의 프레스코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에 그려진 벽화의 하나이다.
하나님 아버지가 최초의 인간 아담에게 생명을 불어넣은 창세기 속 성경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이 작품은 예배당 입구에서 출발하여 구약 이야기가 전개되는 중간 지점에 그려져 있다.
이는 인간과 신이 함께 표현되는 양식을 과감히 창조적으로 표현하면서,
자신의 형상대로 인간을 만든 하나님의 창조적 힘과 인간이 만들어지는 감동적인 순간을 뛰어나게 형상화시킨 작품이다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성 베드로 대성당)
피에타 (이탈리아어 Pietà) 는 이탈리아어로 슬픔, 비탄을 뜻하는 말로 기독교 예술의 주제 중의 하나이다.
주로 성모 마리아가 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
그리스도의 시체를 떠받치고 비통에 잠긴 모습을 묘사한 것을 말하며 주로 조각작품으로 표현된다.
이는 성모 마리아의 7가지 슬픔,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그리고 십자가의 길 제13처에 등 예수의 처형과 죽음을 나타내는 주제이다.
14세기경 독일에서 처음 나타났고
그 특유한 비장미와 주제로 인해 곧 많은 예술가들이 자주 표현하는 주제로 널리 퍼져나갔다.
보통 예수와 슬픔에 잠긴 마리아만을 묘사하지만 때로는 다른 인물들이 등장하기도 한다.
유명한 피에타로는 성 베드로 대성당에 있는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조각상이 있다.
비트루비우스적 인간
비트루비우스적 인간 또는 인체 비례도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소묘 작품이다.
고대 로마의 건축가 비트루비우스가 쓴 ‘건축 10서(De architectura)' 3장 신전 건축 편에서
‘인체의 건축에 적용되는 비례의 규칙을 신전 건축에 사용해야 한다’ 고 쓴 대목을 읽고 그렸다고 전해진다.
원문을 옮기면서 고대의 인체 비례론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실제로 사람을 데려다 눈금자를 들이대면서 측정한 결과를 글로 적어두었다.
“자연이 낸 인체의 중심은 배꼽이다.
등을 대고 누워서 팔 다리를 뻗은 다음
컴퍼스 중심을 배꼽에 맞추고 원을 돌리면 두 팔의 손가락 끝과 두 발의 발가락 끝이 원에 붙는다…
정사각형으로도 된다. 사람 키를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잰 길이는 두 팔을 가로 벌린 너비와 같기 때문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사람의 손가락과 손바닥, 발바닥과 머리, 귀와 코의 크기 등을 숫자로 계산하면서
사람 몸을 기하학적 관점에서 수학적으로 계량화하는 고대 사상을 실험하게 되었다.
레오나르도는 비트루비우스의 설명을 그림으로 옮기면서
고대의 인체 비례론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실제로 사람들을 데려다 실측하여 기록하였다.
아우구스투스에게 《건축십서》를 소개하는 비트루비우스. 1684년 그림
마르쿠스 비트루비우스 폴리오
마르쿠스 비트루비우스 폴리오(라틴어: Marcus Vitruvius Pollio 마르쿠스 위트루위우스 폴리오)
BC 1세기 경에 활약한 고대 로마의 기술자, 건축가이다.
그의 생애에 관하여 알려진 바는 거의 없으며, 심지어 그의 이름이 마르쿠스나 폴리오인지도 확실치 않다.
그의 일생에 관한 모든 것은 오직 그의 저술을 통해 유추해낸 것일 뿐이다. 그
는 율리우스 카이사르 로마군단의 건축기사로 스페인과 갈리아등에서
복무한 것으로 보이며 아마도 군막사, 공성장비, 가도, 다리건설등의 공병일을 담당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후에 아우구스투스가 그에게 재정적 지원을 하였다고 한다.
그는 파눔(Fanum, 현재의 이탈리아 파노)의 한 바실리카를 직접 건축했다고 저서에 썼으나 현재는 전혀 남아있지 않다.
그의 저술로 알려진 《건축십서》(De achitectura)는 10권으로 구성된 일종의 건축학 논문이다.
로마건축의 집대성이라고 할 만하다.
도시계획과 건축일반론, 건축재료, 신전, 극장·목욕탕 등
공공건물, 개인건물, 운하와 벽화, 시계·측량법·천문학, 토목도구 및 군사용 도구 등
건축기술과 관련된 거의 모든 것을 다루고 있다.
이는 그리스 건축에서 상당한 영향을 받았는데 규칙적인 비례와 대칭구조, 고전적 형식미를 강조했다.
그에게 있어 건축은 새나 벌이 둥지를 짓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연의 모방이었으며,
따라서 건축의 재료는 자연에서 구한 것이고 인간에게 휴식처가 되어야한다고 생각하였다.
또 건축구조는 세 가지 본질을 반드시 갖추어야한다고 하였는데 그
것은 견고함(firmitas)과 유용성(utilitas), 또 아름다움(venustas)이다.
그리스 건축양식을 도리스, 이오니아, 코린토스 양식으로 분류한 것도 비트루비우스이다.
그의 죽음에 관해서 알려진 바는 없다.
그는 르네상스 시대에 이르러 재조명되는데, 그의 《건축십서》는 1414년 피렌체에서 재발견되어
르네상스 건축가들에 빠르게 각국 언어로 번역되어 널리 읽혔으며
고대 로마 건축 연구 및 르네상스, 바로크, 신고전주의에 이르기까지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그의 영향을 받아 유명한 비트루비우스 해부도를 그렸다.
Solo Hay Una Para Mi /Semino Ross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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